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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한테 심부름 시키는 딸 목소리.
"엄마 엄마~ "
나한테 급하게 할이야기를 할 때 부르는 아들 목소리.
아이들이 나를 부를 때, 아직도 나는 엄마라는 저 언어가 나를 향하는 말인걸 직감할 때마다 마음이 뭔가 어색하기도 하면서 몽글하다. 이제는 아이를 낳고 키운지가 강산 한번이 바뀌고도 남을 시간이 되었는데, 왜 아직도 나는 내가 엄마라는 언어가 내 옷이 아닌 듯 어색할까? 둘이나 되는 아이들이 나를 '엄마'라고 생각하고 품고 살고 있다니, 세상에나 내가 과연 저 단어에 적격한가 싶을 정도로 조금 멋적기도 하고 몸둘 바를 모르겠다. 너희들의 렌즈 속에서 '엄마'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을까?
고백컨데, 유년시절의 나는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불안 속의 아픈 기억이 더 많이 자리잡고 있다. 물론 그 분들 만의 표현 방식이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게 느껴지지지 않았고 그저 집을 벗어날 수 있는 대학에 입학하는게 나의 가장 큰 목표였다. 그렇게 독립을 하면 드디어 연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드디어 집을 벗어날 수 있는 대학에 입학 한 다음부터 현재까지 꿈꿔왔던 대로 부모와 같은 집에 살지 않지만, 안타깝게도 그것 만으로는 연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책장을 덮어도 끝나지 않는 끝도 없는 이후가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던 나였다. 자주 연대하고 소통하지 않으면 친구든 지인이든 거의 모든 관계는 시절 인연으로 자연스레 멀어져 간다. 하지만 부모와는 아무리 소통하지 않아도 평행하게 간다는 사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죽기 전까지 끊어지지 않는 연이 혈연이라는 것을 과거의 나는 왜 꿈에도 몰랐을까.
그러다 보니 부모에게 사랑 받아본 기억이 희미한 나에게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가 표현하는 방식이 과연 잘 하고 있는건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내가 보고 배운게 없고, 그렇게 물려받은 기질 때문인지 나 역시 본능적으로 해주는 방법을 잘 모르는데, 나도 답습하면 안되는데, 하는 이성이 나를 자격지심으로 쭈그러들게 할 때도 다반사다. 그래서 나보다 훨씬 감성적인 본능으로 아이들을 편하게 대하는 남편을 볼 때마다 나의 결핍을 대신 채워주는 상황에 대해서 그저 감사하고, 마치 내가 저런 아빠가 생긴 것 처럼 마음의 안정감이 종종 들기도 한다. 그래도 보고 배울 사람이 있어서, 나도 흉내내 보기도 하며 엄마 역할을 하려 '애쓰며' 아이들의 유년시절을 함께 하고 있는 한 복판 속에 현재의 내가 살아가고 있다.
여김없이 오늘도 수차례 나를 '엄마' 라고 불러주는 아이들의 목소리는, 사랑을 갈구했던 어린시절의 꽝꽝 얼은 고독한 나를 시나브로 녹여주는 포근한 실바람 같다. 이제는 '엄마' 라는 타이틀이 여전히 나에게 어색하고 낯설다는 나의 높은 잣대를 조금 무너뜨리고, 그래 나 엄마, 자격 있는 엄마 맞아. 라고 당당히 말하며, 과거의 꽁꽁 싸맨 불안을 살짝 풀어보고도 싶다.
영원한 것은 없다. 그렇게 세상은 돌고 돌아 어쩌면 부모가 처음이어서 잘 못했던 것이 내내 미안했던 나의 부모가, 현재의 경쾌한 아이들 모습의 일부로 돌아와서 다시 새로운 관계를 처음부터 만들어보자고 내민 손 같이 보이기도 하다.
영원한 단절도 없고 영원한 행복도 없다. 완전무결한 기억도 없고, 상처 하나 없는 과일이 될 생각도 없다. 그저 나는 하루하루 부모로서의 내 역할에 맞게 생의 바퀴 한 가운데를 충실히 돌려보려 오늘도 시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