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글을 삭제하다가
타임머신 소환
나는 싸이월드가 유행하기도 전에 블로그를 했었다. 혹여 거대 자본에게 타인의 개인정보가 악용될까 우려되어, 내 블로그 방명록 안부글들을 삭제하러 오랜만에 들어갔다. 전체 삭제가 안되어서 글 하나씩 삭제를 해야 했다. 한 땀 한 땀 안부글을 지워 가다 보니 어느덧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청춘 시절의 한 복판에 불현듯 빨려 들어가 버렸다.
얼마 지난 것 같지도 않은(?) 20대 시절을 나는 얼추 기억한다고 자만했으나, 날 것의 과거 글을 하나씩 읽어나가며 지우다 보니 깨달았다. 그렇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그렇다. 망각은 인간의 순기능이다.
종이 글씨는 흐려지기고 뭉개지기라도 하지, 게시판에 새겨진 활자는 띄어쓰기 단 한 톨도 변화 없이 인공 로봇처럼 나타나서 나를 기억 저편 한복판으로 떨어뜨렸다.
청춘 기록
안부글에는 그 시절 나의 관심사와 친구들의 고민. 갈등. 여행. 공부. 술. 취직 준비. 알바. 연애. 내 모든 청춘을 지배했던 것들이 방부제 먹은 양 그대로 생생하게 담겨있다. 한참을 보며 피싯 하며 웃고 장문의 진심의 글을 보고 뭉클해져서는 아련한 마음을 내리려고 침을 꿀떡 삼켰다. 나만 미래에서 왔고 이 어린 청춘 친구들 바로 내 눈 앞에 서 있는 것 같다.
어떤 친구는 싸이월드 개설했다며 주소 링크를 친히 달아놓았고, 어떤 친구는 통신사 할인데이에 영화 보자며 연락하라고 016 번호를 적어놓았다. 여행 떠다니다 만났던 머나먼 인연이 무심한 듯 자주 글을 남긴걸 보니 그때는 각별했나 보다. 현 남편, 그러니깐 그 시절 남친에게 받은 부지기수로 엉키는 글, 오그라드는 화해의 글을 보니 지금 내 옆 이 사람의 친필이 정녕 맞는가 싶어 머쓱해진다.
고등학교 고향 친구들은 친구 결혼 소식, 취업 소식을 전하며 자꾸 나보고 지금 어디냐고 묻는 걸 보니, 그 시절 나는 이 나라 저 지방 부단히도 떠돌았나 보다. 기숙사 후배, 동아리 친구 인가 이제는 이름도 기억 안나는 친구와의 안부글. 그때 우리는 방학 때 서로 뭐하나 궁금해하며 파도타기로 들락거리며 소셜 네트워킹에 서서히 중독되던 초창기였음을 상기했다. 국가고시 직전 지겨움을 달래며, 국고실 옆 컴퓨터실에서 시답잖은 안부글 남기며 킬킬대고 옥상 자판기 커피 마시며 노닥거리는 게 세상 재미있었던 응답하라 그 시절이 나의 청춘이었다.
그 시절 나는
그 시절에는 가장 중요했던 게 뭐였을까? 어떤 알바로 갈아타고, 누구랑 뭐 하고 놀고, 졸업해서 뭐하고 살까, 어떻게 연애해야 하나. 뭐 이런 푸릇푸릇하고 고만고만한 고민거리였는데 왜 그때는 세상 심오하고 나만 특별한 중요함으로 여기고 그렇게도 고뇌했을까?
언젠가 노년의 내가 불혹 시절의 이 글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들까? 얼마로 어디에 투자하고, 어떤 교육 환경이 중요하고, 어디에 살아야 하고, 어떻게 마음을 먹고, 어떤 일로 어떤 자리에 이르고 싶고. 뭐 이런 지금의 복잡하고 치열한 관심사가 미래에는 부질없이 느껴질까?
존경하는 분께서 은퇴 전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다.
'시간 한참 남은 것 같지? 나도 어? 하다 보니 환갑이더라고. 아람 선생도 환갑이 되는 시점에 아! 그때 그 사람이 그래서 그 말을 했구나 라고 기억할 날이 어? 하면 와 있을 거야'
아련한 과거를 그리워해 봤자 돌아갈 수 없고, 현재를 잘살자 다짐해 봤자 또다시 실수하고 후회하며 살아갈 것을 안다. 나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고 거대한 인생의 바퀴 속 하루를 그저 살아갈 일개 인간일 뿐이다. 그런 하루하루가 연결되며 때론 누군가와 멀어지고 가까워지며, 때론 어떤 관심사가 멀어지고 가까워지기도 하며 그렇게 생의 끝을 향해서 그저 걸어갈 뿐이다.
어쩌면 몇십 년 후에는 이런 자판 글보다 연필과 종이가 좋다며, 골동품을 구해서 애써 끄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부터 나는 항상 뭔가 항상 꾸준히 쓰며 살았으니 내 생이 다할 때까지 나는 분명 어디든 어떤 방식으로든 끄적거리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류의 일관성이 결국 내 정체성이 되지 않을까 싶다. 흘러가는 세월 속 흘러가는 인연 속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그것. 또는 마지막 까지 지켜려 애쓴 그 소중한 무언가가 결국 내가 되지 않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나를 만나니, 미래의 나까지 궁금해지는 오늘이다. 망각의 동물 인간으로 태어난 나는, 때로는 과하게 엇나가며 선로를 이탈해서 상실감에 버거울 상황이 올 때 이렇게 과거의 나를 다시금 만나서 그 시절 꿈꾸고 고민했던 미래를 기억해내며, 때로는 썩 괜찮았던 과거의 나를 기억하며 미래를 살아갈 동력을 얻어야겠다. 이거 꽤나 괜찮은 방법이 될 것 같다.
이렇게 십몇년 전 묵은 안부글이 오늘 다시 읽힐 줄 누가 알았겠나. 내 과거 친구들의 깨발랄한 안부를 아로새기며, 현재의 내가 든든한 힘을 받아 마음이 소복하게 쌓여가는 따뜻한 밤이다.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니. 원하는 대로만 할 수는 없지만, 알 수 없는 내일이 있다는 건 설레는 일이야. 두렵기는 해도. 산다는 건 다 그런 거야.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 여행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