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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 Jan 12. 2024

나는 내 우울이 사랑스럽다.

특정한 냄새를 맡으면 순식간에 그 냄새가 나는 과거의 그때로 돌아간다. 특정한 노래의 첫 반주음을 들으면 순식간에 그 노래에 빠져들었던 과거의 상황으로 돌아간다. 아주 짧은 순간의 후각이나 청각만으로 내 몸은 타임머신을 순식간에 타게 된다. 오늘 나는 순식간에 과거로 돌아갔다. 내 인생 가장 최악의 그 순간으로 또 훅 들어가 버렸다. 나를 후크로 훅 집어 들어서 돌아간 그 과거의 그 시절, 난 처절하게 우울했었다.


배신감과 상실감이 원인이었다. 그 당시 나는 너무 우울해서 사리분별력이 없었다. 죽음을 자꾸 생각했었다. 많은 기억이 이미 모호해졌다. 이제는 다행히 우물에서 스스로 나왔다. 그 터널에서 나올 때까지는 정말이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타인을 보게 되었다. 나의 삶과 전혀 연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목격한 순간 순식간에 과거의 나의 우울의 우물 속으로 바로 빠져들었다. 마치 자석처럼 순식간에.


거대한 심연 속 내 마음 안에서 우울이는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내가 물었다.

"어. 난 똑같이 여기 있었어. 난 여전히 우울해. 너무나 억울하고, 속상해. 왜 내 거를 뺏어갔는지 억울하고, 왜 나를 싫어하는지 속상해. 난 사랑받지 못해서 우울해. 난 선택받지 못해서 우울해."

우울이는 오랜만에 나와의 만남이 반가운지 말이 많았다.

나도 오늘은 말이 많아졌다.


"내가 항상 너랑 살았을 때가 갑자기 떠올라서 왔어. 그때는 너만 나를 이해해 준다고 생각했는데, 맨날 너와 함께 온 힘으로 우울해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너와 함께 있었던 기간이 너무나 길어서 나는 지금도 그 모든 순간이 생생해. 아무리 울어도 끝도 없이 나오던 눈물의 맛도 기억나. 술을 먹어서 기억이 안나는 건지, 술을 먹고 잊어버려서 기억이 안 나는 건지 매 순간 안개처럼 모호했던 뿌연 공간이 기억나. 희망을 표현했던 내 편지지 색깔과 문양이 기억나. 결국 그 편지조차 외면받고, 너무나 우울해서 주저앉아버렸던 아파트 계단 바닥의 차가움도 기억나. 장례식장 테이블에서 낑겨앉았던 나는 주눅들었고, 나를 피하라는 듯한 눈짓 사이에서 할일 없어 입에 넣었던 맛없는 미역국의 촉감도 기억나.


그때 내 옆에는 우울이 너밖에 없었는데 말이지. 자꾸 내가 너를 지우려 할수록 너는 더 커졌어. 아무리 긍정이를 데리고 오려고 해도, 긍정이가 떠나자마자 기나긴 밤을 지켜준 건 너였어. 너는 내가 아무리 못나고 답답한 짓만 계속해도 억지로 멈추라고 하지 않았어. 그저 우울한 감정을 충분히 느끼게 해 줬어. 그리고 내가 왜 우울한지에 대해서 분노도 데려오고 억울이도 데려오고  예민이도 데려오면서 내 편을 충분히 들어줬지 뭐야.


몇 년이나 너와 진하게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했었지. 너는 고향같았어. 내가 아무 때나 너의 우물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어서 떠나라고 채근하지 않았어. 그냥 충실히 우울한 마음을 느끼게 해 줬어. 그냥 내가 왔나 보다 정도로 나를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여겨줬어. 그러다 보면 나는 충분히 머물다가 어느새 걸을 힘이 나서 또 우물 위로 올라갔지. 그러다 또 오늘처럼 순식간에 내려오기도 하고 말이야.


우울아, 난 오늘 그 시절의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을 우연히 만났어. 그 사람도 아마 충분한 시간 동안 너를 만나겠지? 네가 없었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 온통 무기력한 마음, 뜻대로 되지 않는 답답함, 버림받은 후의 상실감,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 곳에서의 외로움 등등 그 모든 끔찍한 상황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네가 없었다면 다들 미쳐버리지 않았을까?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기쁨과 긍정이 보다, 삶의 이면에서 최선을 다해 우울한 감정을 충실히 표현해 주는 우울이 네가 오늘따라 참 사랑스러워 보여. 그리고 너무 대견해 보여. 너는 죽음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멍해져 버린 사람들을 주로 보겠지. 침몰하는 그들에게 어디라도 좀 앉을 곳을 찾아주는 네가 고맙고 대견하다. 세상이 억지 희망과 극복을 강요할 때, 유일하게 나를 있는 그대로 편하게 쉴 수 있게 해준건 바로 너였어.


우울아. 난 이제 너를 억지로 피하고 싶지도 않고, 억지로 친하고 싶지도 않아. 그저 내 거대한 마음속 한 구석에 항상 존재한다는 것 만으로 충분하고 소중해. 오늘 그 사람처럼, 세상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이유든 우울해질 때, 나는 우울이라는 감정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큰 안정감을 느껴. 그래서 오늘따라 나는 심연의 내 마음속에 가장 오랫동안 앉아있었던 우울이, 바로 네가 정말 고맙고 사랑스럽다. 한 번은 꼭 이렇게 인사를 하고 싶었어. 그럼. 잘 지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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