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찬란 Jan 27. 2024

이사는 수많은 이별과 만남

이사를 앞두고 매사 감성적으로 돌변하고 있다. 어제는 집에 가는 횡단보도에 멈춰있었는데, '이 길을 이제 마지막으로 건너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초록불을 누구보다 아련하게 쳐다보며 길을 건넜다. 정문 조형물을 보고서도 이곳에서 숱하게 어린이집 등하원 시키느라 서있었던 추억이 생각났다. 7년 내내 매일 저녁 집 앞 놀이터 지킴이처럼 살았던 내 자신과, 이제는 놀이터를 패싱하는 다 커버린 아이들이 생각났다. 경비 아저씨랑 편의점 아저씨도 이젠 안녕이다. 물론 나 혼자 안녕이지만.


이렇게 말하면 내가 이 지역을 떠나는가 싶을 텐데, 사실 100m도 안 되는 앞단지로 이사 가는데 이러고 있다.  집 안은 또 어떤가. 나와 영영 이별할 수명을 다한 가전과 가구 몇 개에 폐기물 스티커를 붙이는데 뭔가 좀 시원섭섭하다. 저녁에 아들이랑 재활용 쓰레기를 한바탕 버리고 돌아왔다. 돌아오며 '쓰레기 버리는 것도 이제 마지막이네.'라고 말했는데, 역시나 아들은 반응이 없었다.


평소 집안 살림을 몹시 귀찮아하는 나에게 이사 준비는 굉장한 챌린지였다. 낡고 이용 안 하는 티비장을 폐기물로 버리려니 너무 무거워서 엄두가 안 나고 아깝기도 했다. 혹시 누구라도 가져가주면 좋겠다 싶었다. 당근마켓 어플을 오랜만에 들어가 봤다. 반응이 없으면 그냥 버리자는 생각으로 헐값에 올려봤다. 그런데 바로 연락이 왔다. 연세 있는 부부가 와서 낑낑거리며 가져가시면서 좋은데 쓰겠다고 말씀하셨다. 다소 귀찮지만, 중고 시장을 이용하면 내 물품이 수명을 다하지 않고, 또 새로운 목숨을 얻는다는 뿌듯함을 알게 되었다.


거기부터였다. 나는 열심히 내 물품 사진을 찍고, 판매하고, 또 기부했다. 처음엔 모든 게 정말 귀찮았는데 뿌듯함이 중독이 돼서 나중에는 재미있어졌다. 제주도는 지금이 이사 구간이어서 중고 시장이 엄청나게 활발했다. 거기에 나에게 현금도 들어오니, 더 큰 동력이 되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 타던 눈썰매를 지인에게 줬더니, 신나게 잘 타는 그 집 아이 사진으로 돌아왔다. 나 역시 썰매를 타는 것 마냥 신이 났다. 먼지만 쌓였던 낡고 닳은 교자상을 무료 드림으로 올렸는데 신기하게 1주일 후 누군가가 그걸 받아갔다. 아이 나이만큼 오래된 놀이방 매트도 필요한 누군가가 드림받아갔다. 아이가 아플 때 쓰던 많은 가정용 의료기기들을 버리는데 정말 속이 시원하고, 더 이상 치료기기가 필요 없어진 건강한 아이에게 감사했다. 하나씩 버릴 때마다 그 물건들은 마치 자유를 얻는 것 같았다.


버리는 만큼 새로운 것들도 조금씩 들이고 있다. 돈 주고 사려니 너무 비싼 가구를 중고로 사 보기로 했다. 딸도 처음엔 남이 쓰던 침대 안 쓴다고 그러더니만, 내가 가구점에 데려가서 금액을 확인시키고, 중고 구매 시 본인에게 제공될 소정의 용돈으로 구슬리니 생각보다 흔쾌히 승낙했다. 조립과 운송 대행도 견적을 받아보고 경험해 보며 조금씩 신뢰감이 생겼다.


창고에서 숨 죽어서 살던  알지도 못했던 짐들, 언젠가 누가 읽겠지 싶어서 욕심부렸던 책들, 언젠간 또 입겠지 싶어서 버리지 못했던 옷들도 하나씩 정리해 갔다. 이 집에 살면서 처음으로 이제 모든 집안 물품들이 내 머릿속 안에 들어온다. (끝까지 미루던 냉장고는 아직도 정리 못했지만..) 모든 물건들이 내 머릿속 안에 있다는 명료한 이 느낌이 참 좋다. 내일은 이사 후 이 집을 완전 리모델링한다며 집주인과 공사업자가 방문하기로 했다. 이렇게 이곳에서 우리의 흔적은 영원히 사라진다.


청소와 구매를 귀찮아하는 나에게 '이사'라는 이벤트는 생각보다 큰 스트레스였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사라는 건 수많은 이별과 만남과 깨달음이 반복되는 굉장한 이벤트였다. 복작복작한 나날이 지나면 또 새 집에서 많은 걸 잊고 또 익숙해지겠지. 그래도 억지로라도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며, 조금 더 개운한 마음으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으니 '이사'는 어쩌면 좋은 스트레스인지도 모른다. 안녕, 내 시절. 안녕, 내 집.





매거진의 이전글 비현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