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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 May 09. 2024

봄의 한가운데 - 3


젖 못 빠는 망아지의 예후 불량 판정을 내뱉은 날, 내 기력은 거의 소진되었다. 그즈음 바로 옆방에는 며칠째 변이 안 나와서 고생하다 결국 응급수술로 배를 열어서 내장의 문제를 해결한 어미말이 입원해 있었다. 수술이 깔끔해서 크게 걱정하지 않았고, 수술 다음날부터 밥 달라고 온종일 설치며 기력도 좋았다. 옆방의 기약 없는 앙상한 망아지와 달리, 이 말은 식욕도 존재감도 넘쳤다.


하지만 수술 며칠 후부터 극도의 탈수증상과 함께 갑자기 엄청난 물설사를 시작했다. 변비가 오래되면서 장의 일부가 수술 전부터 이미 손상되었고, 장상피세포가 회복이 안돼서 설사를 유발하는 술후 합병증이었다. 수액을 쏟아부으며 탈수를 교정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또 기나긴 야간치료가 시작되었다. 말이 크니 낮밤으로 들어가는 약도 엄청났다.


약을 들이부어도 물총 설사양은 바닥을 흥건히 적실만큼 많았고, 일주일이 지나니 엉덩이 살까지 다 빠지며 뼈만 앙상해졌다. 그 와중에 생후 1개월령 딸린 망아지는 잘 나오지도 않는 어미젖만 물고, 분유병 급여를 완전히 거부해서 망아지 또한 점점 마르고 힘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일주일 남짓, 또다시 판정의 시간이 돌아왔다. 약장을 거덜낼만큼 수액이 들어갔는데, 설사는 여전하고 탈수는 교정이 안되고, 얼굴과 다리 부종은 심해지고, 경정맥에 염증도 왔고, 말의 잇몸 점막은 책에서나 볼법한 건조한 검붉은 색이었다.


결국 나는 주인에게 또 예후불량 및 퇴원을 통보했다. 입원관리자도 퇴근시키고 말은 내일 아침 가져가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내 발걸음이 도무지 안 떨어졌다. 밤샘수액 끊으면 어찌 될지 뻔해서, 결국 나는 집에 안 가고 수액을 직접 주며 하루라도 편하게 있다 가길 바랐다. 조용한 입원실에서 가만히 수액을 주다가 평소에 안 쓰는 약을 뜯었다. 검증이 안돼서 잘 못써보던 제제인데, 이제 마지막이다 싶어서 수액과 섞어서 천천히 투여해 보았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고, 이제 집에 가려 하는데 갑자기 또 응급 전화가 왔다. 응급수술이 필요한 케이스였다. 나는 어차피 아직 내가 병원에 있으니 데리고 오라고 전했고, 수술팀원을 야밤에 소집했다. 한 시간쯤 지나서 팀원도 하나둘 도착하고, 이어서 말 수송차도 새까만 밤중에 도착했다. 그런데 수송차를 여니 말이 쓰러져 있었다. 심장은 이미 멈춰 있었고 우리는 돌이킬 수 없었다.


컴컴한 밤을 뚫고서 어렵게 말을 데려온 관리자들과, 기꺼이 콜에 응해준 진료진 여러 명은 허무하게 담배만 몇 대 피우다가 다시 돌아갔다. 한바탕 그 소동을 마치다 보니, 밤이 몹시 늦었다. 돌이켜보면 죽은 말은 산 말의 야간 치료시간을 벌어주었고 입원말은 수액과 치료제제를 제법 충분히 맞았다. 이른 아침 다시 검사를 돌렸다. 다행히 어젯밤 약에 대한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아주 아주 작은 희망 한 점이 보였다. 나는 이번에는 다른 것들에 영향받지 않고, 오로지 말의 수의학적 상태만 생각해 보기로 결심했다. 심플해졌다. 이른 아침이지만 마주에게 전화했다.


“오늘 아침에 데려가시기로 하셨죠. 그런데 말 상태에 대해 제가 조금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오시면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주에게 일단 나는 몸속의 알부민까지 설사로 계속 빠지고 있는 전신 증상의 총체적 문제를 알렸다. 입원 며칠 더 한다고 바로 나아지진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래도 거의 마른 젖일지라도 망아지가 여전히 의존하고 있고, 약 치료를 종일 지속하면 또 하루씩은 버틴다 했다. 장상피가 앞으로 회복이 될지 보장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며칠만이라도 입원 연장을 의뢰한다면 나는 치료할 용의가 있으며, 그게 망아지에게라도 조금 더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어제의 내 통보를 뒤엎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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