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찬란 May 09. 2024

봄의 한가운데 - 최종

주인은 어차피 말 팔자라며 그러면 이삼일만 더 치료해 보자고 동의했다. 나는 시간을 벌었다. 물줄기 같은 설사는 어쩔 때는 조금 형태가 보이는 것 같아서 안심하다가도 또다시 악화되기도 하며 야속하게 호전에 속도를 내지 못했다. 장상피세포 회복이 더디니 몸 밖으로 알부민이 자꾸 빠져나가서 다리는 붓고 젖도 안 나오고 탈수 교정이 여전히 되지 않았다. 잇몸 색깔은 핑크빛이 아니라 검붉은 색깔이었고, 목에 위치한 혈관에 염증까지 생겨서, 미세 혈관이 뺨까지 노장돼서 뼈만 남은 말이 한마디로 만신창이처럼 보인다. 여전히 종종 다리를 긁고 배를 쳐다보며 아파하는 통증도 역시 사라지지 않는다.   


5일여간의 추가 연장전에서 적극적인 약물 치료에도 불구하고 나는 큰 성패를 보지 못했다. 말은 동일한 모습이다. 하지만 나는 몹시 미세한 차이를 생각했다. 희망회로라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일단 말이 아직 통증이 있음에도 밥을 먹고, 염증수치는 더 오르지 않고, 알부민 수치는 최악이긴 하지만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있었다. 체중 역시 더 떨어지지는 않았다. 물설사가 멎을 만큼 장상피세포가 속히 회복되고 전신 증상이 개선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내 마음은 생의 확률이 51%, 사의 확률이 49%라 생각했으나 객관적 확신이 없어서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망아지는 덕분에 시간을 벌어서 이제는 알아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뼈만 남은 쇠약한 어미말에게 추가 약을 처방하고 긴 터널을 이제는 스스로 걸어가 보라고 내보냈다.


일주일이 흘렀다. 전화를 해보고 싶은데, 용기가 나지 않았다. 늘 용기가 나지 않는다. 성적표를 보는 것 같다. 굳이 떠들출 필요도, 책임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그런데 나는 전화기만 보고 있다. 무지하게 신경이 쓰였지만 무심한 척 결국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지난번 ㅇㅇ 퇴원 후 어떤가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마음속 카운트다운이 열린다. 3.. 2.. 1.... 벌렁벌렁.

"아. 잘 있습니다."

"네??? 살아있다고요? 증상은요? 설사는 멈췄나요? 이제 젖은 나와요?"

질문을 한 너댓개 따발총으로 쏘다가 정신을 차렸다. 맘 같아서는 당장 가보고 싶지만 체면을 차렸다.


그렇게 두 마리의 환자, 두 세트의 어미말과 망아지가 올봄에 찐하게 나를 뒤흔들며 벚꽃이 피고 지듯 또 한 시절이 흘러갔다.


어쩔 땐 가혹하기도 하다. 잘되든지, 못되든지 딱 두 개로만 승패는 결정 난다. 그 중간의 온갖 스토리와 좌절과 헤맴과 노력들은 사실 보이지 않고 완전히 사라진다. 스포츠 선수도 그런 느낌일까? 정치인도 그런 느낌일까? 오로지 '승'만이 내 가치를 증명해 주는 세상 속에서 나 혼자 땅 파는 것 같은 이야기는 분명 나뿐만이 아닐 것 같다.


이 이야기조차도 '승'이 아니었다면 감히 꺼내지 못했을 것이고, 내 안의 겹겹이 쌓은 그 수많은 '패'로 끝난 이야기들. 나는 표면 말고 그 밑의 수많은 종이 조각들로 내 인생을 채워가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결과'가 좋아야 '과정'을 살펴 봐주는 세상 속에서 한번쯤은 결과를 종이로 가리고 '과정' 이야기만 각 잡고 쓰고 싶었다. 아니 언젠가는 쓰고 싶다.


과정에 최선을 다 했음에도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온다면, 미련을 두지 않으며 그건 하늘의 뜻이라고 여겨야 하는 게 늘 쉽지 않다. 그래도 결과에 실망한다기보다는 최선을 다 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후회가 날 더 괴롭혔다. 만약 최선에 기준점이 있다면, 그건 자기 자신만이 설정하는 시지프스의 바위 같은 존재인 것만 같다.


동물병원을 거친 그 수많은 페이지 중에서 운이 좋은 두 마리의 말은 다행히 오늘도 살아서 편안히 어디선가 풀을 먹고 있을 것이다.


지금 살아 있다는 것. 그건, 생각보다 엄청 운이 좋은 거다.


매거진의 이전글 봄의 한가운데 -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