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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 Aug 28. 2024

나비

정신승리

내 일터에는 희한한 점이 하나 있다. 건물 안으로 나방이나 나비가 느닷없이 잘 들어온다는 것이다. 아침에 와보면 복도에 나비가 펄럭거리기도 하고, 죽어가는 나방이 바닥에 몇 마리 있기도 하다. 처음엔, 이 동네에 나비가 많은가 보다 여기며 별생각 없이 넘어갔다. 그러다 오늘 문득 희한한 상상을 하게 되었다.


고백컨데 나는 그동안 동물을 죽인 적이 너무 많다. 나의 미숙함으로 죽음으로 가는 시계를 가속화할 때도 있었고, 생물학적인 이유로는 꼭 죽지 않아도 되는데, 여러 가지 정황으로 죽음을 판정해 주기도 했다. 어차피 결정된 커다란 방향키를 내가 움직일 수 있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교만일 수도 있지만, 내 스스로가 그걸 움직이지 못한다고 느꼈을 때 내가 수의사라고 불리는 게 부끄러웠다.


오늘도 노란색과 흰색 빛의 작은 나비가 내 사무실 복도까지 펄럭대며 침범해서 걸어가던 나를 멈추게 했다. 문을 열어놓는 것도 아니고, 건물 안에 꽃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들어오지? 왜 자꾸 들어왔다가 못 나가고 여기서 죽지? 복도에서 이리저리 펄럭거리며 내 시야 안으로 들어오는 바쁜 나비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나만의 공상이 시작되었다. 철저히 내 상상 속 생각이다.


혹시, 어쩌면 혹시 이 나비들은 그동안 이곳에서 죽어나간 말들의 영혼을 담고 다시 오는 존재들이 아닐까? 어쩌면 나에게 고맙다고 표현하고 싶어서일까? 어쩌면 이곳에서 또 생을 마감하고 오고 싶어 하는 것일까? 그래서 기어코 이 건물 안으로 찾아들어오는 것일까?


그렇다. 나는 사실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이런 상상을 하고 있다. 동물은 말을 못 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진료한 동물에게 그 어떤 원망도, 질책도, 감사도 듣지 못한다. 다만 그 주인인 사람에게 음성 언어를 듣는다. 주인이 나를 원망하기도 하고 감사해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건 주인의 시점에 따른 언어일 뿐이다. 동물이 생을 마감하는 순간의 마지막 고통과, 고통을 줄이려는 줄다리기, 던져진 방향키를 바꾸려고 애쓰던 그 선택과 후회와 고뇌를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안락사를 하고 난 후에, 나도, 주인도 이게 말에게 더 나은 일일 것이라고 자기 위안을 한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했을 때 말이 정말 죽는 걸 바랐는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나는 늘 죄스럽고 미안했다. 아무리 정신 승리를 하려 해도 공허했고, 그 대상체가 나에게 괜찮다고, 잘한 일이라고 말해줘야만 비로소 그 돌덩이가 내려갈 것 같았다. 오늘은 나비를 보며 그게 말의 영혼이 돌아온 것처럼 믿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펄럭이는 나비를 보며 씽긋 한번 웃어줬고, 바닥에 죽어가고 있는 나방은 피하지 않고 잘 옮겨주었다.


때론 내가 원하는 대로의 생각을 먼저 하고, 내 마음이 그에 맞춰주며, 그다음으로 행동이 따라가는 방법을 써 본다. '생각'이 이 모든 것들의 대장이라면 굳이 미리 비극적이고 현실적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대장은 조금 더 긍정적이고 낭만적이고 진취적이고 싶다. 그래야 내 마음도, 내 행동도 휘둘리지 않고 복종하며 따라갈 것 같다. 그래야 내일 또 리셋된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것 같다. 내일 또 나비가 나타나면 더 이쁜 이야기를 해줘야겠다고 구체적으로 생각했다. "오호. 날 보러 와줬구나. 날 찾아와 줘서 고마워. 그리고 고맙다고 말해줘서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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