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가 달려온다.

내가 변해야 할 차례

by 말자까

아이들은 이미 내가 생각하는 변화의 속도보다 빨리 변하는 시기가 와버렸다. 아이들 방에 가득 있던 장난감 서랍이 외면받은게 한참 전인데, 나는 아직도 그 장난감 서랍처럼 그저 정체되어 있었다. 아마도 온라인 수업이 시작되는 그 지점에서 부터 동시에 아이들은 또다른 차원으로 이미 들어가 버렸나보다. 처음에는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니 둘이 심심해 보이는 모습에 안타까워 내가 뭔가 놀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마지막까지 아이들이 놀던 조립 장난감이나 그리기 등이 시들시들해지고, 이제 정말 마지막으로 아이들과 요즘 노는 것은 몇 개의 보드게임 정도 되어서 추운 겨우내 저녁에는 보드게임을 많이 했었다. 그런데 그것도 이제 그나마 첫째는 그냥 심심하고 할 게 없으니 그냥 맞춰주는 것 같고, 이마저도 그렇게 신나지는 않은 눈치다. 신나 하는 것은 셋 중에서 둘째 뿐인 듯 싶은 오묘한 게임 시간이다.


아이들은 온라인 수업을 통해 데스크탑과 여러가지 플랫폼과 SNS를 접하게 되고, 그리고 결국 인터넷의 재미를 알게 되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나조차도 집에서 책을 보지 않고 휴대폰을 쳐다보는 시간이 더 많은 마당에, 어떻게 애들한테 휴대폰 보지 말라고 무조건 말할 수 있겠는가. 아이들끼리 주고받는 카톡을 보면 도대체 내가 통제를 해야 하는 범위를 어디까지 설정해야 하는가 생각되며 머릿속이 어려워서 그냥 외면하고 싶기만 하다. 그럼에도 한번씩 학교에서나 온라인 수업 중 있었던 일을 신나서 조잘거리며 나에게 알려줄 때에는 긴장이 풀리며 이내 안심하다가도 이 또한 점점 끝이 다가올 것 같은 왠지 모를 쫄림이 느껴진다.


저녁에는 아이들이랑 밖에 나가려고 애쓴다. 이제 내가 사정 사정 해야 나가주는 애들이다. 내가 피곤한 날은 너네 둘이 나가라고 내보내 보기도 하지만, 이내 얼마 안되 되돌아 오는데 왜냐 물으면 놀 애들이 아무도 없고 쮸쮸들 (어린아이들)만 있으며 둘이 놀기는 심심하다고 한다. 하긴, 작년까지만 해도 나가면 몇 명은 항상 나오는 비슷한 또래 무리들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고학년이 되니 다들 저녁에 공부를 하는지 무엇을 하는지 근방에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결국 나는 날씨만 허락한다면 내가 피곤하든 어떻든 아이들이랑 일과처럼 나가야 한다고 다짐하는 일종의 압박이 있다. 사실 나 역시 집에 오면 먹고 누워서 보고 싶은 것들도 많은데, 그래도 일단 나가서 걸으며 뭐라도 하다 보면 그래도 뭔가 이야기도 더 하게 되는 것 같고 이게 내가 해줄 역할 같으며, 이제 이럴 날도 얼마 없을 것 같아 내가 더욱 매달리는 것 같다. 정녕 각자 휴대폰을 들고 있는 그 정적의 시간이 집안의 평화가 되는 이 상황을 인정해야 하는가. 아. 아직은 적응이 안된다.


유년 시절 흐릿한 좋은 기억 중 하나는, 학교 갔다 와서 주방에서 요리하는 엄마에게 붙어서 끝도 없이 있었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장면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내가 하는 이야기가 마냥 재미있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잘 들어줬는지 모르겠다. 나도 이제 딴 생각 말고 뭐라도 잘 들어줘야 되는데, 게임 이야기를 흥미롭게 하는 아들의 이야기에 맞장구치며 집중해주는 것은 난이도가 꽤 높다.


이제 곧 올 사춘기에, 아니 어쩌면 이미 와버린 사춘기가 되면 의견대립은 점점 심해지고 멀어질 걸 알기에 무언가 불안하기도, 내가 잘하고 있나 걱정되기도 하는 요즘이다. 엄마는 처음이라 항상 매순간마다 선택의 갈림길이 온다. 엄마라는 역할은 참으로 두렵고 어렵다. 정답도 없고 누가 알려주지도 않지만 그래도 이제는 내가 장난감을 좀 버리고 마음이 변화해야 할 차례라는 것을, 어느새 흘러 들어오는 여름 바람을 맞는 것처럼 그저 인정해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코로나와 다시 초보가 된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