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직날 아침 출근 후 사무실을 열고 cctv를 켜니 어라 입원한 말 세 마리 중 두 마리가 이상했다. 하나는 누워서 힘없이 가쁜 숨을 내쉬고 있고, 하나는 누웠다가 일어나서 뱅뱅 돌다 반복하고 있다. 아무도 없고 혼자 근무하는 날이라 머리가 곤두섰다. 어제 근무자의 치료 기록을 읽으며 누구를 먼저 봐야 할지 그 우선순위를 머릿속에는 정했으나, 몸이 내 맘대로 놀지가 않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갈 지자가 따로 없다.
먼저 첫 번째 말 관리자를 불러서 검사 돌리고, 초음파를 보고, 링거를 연결한 다음 두 번째 말에게 이르렀다. 한 2주 넘게 치료한 말인데 매일매일 살이 빠지고 기력이 저하되는 말이다. 기록을 보니 어제부터 염증 수치와 바이탈이 급격하게 악화되고 있었다. 드문 케이스라 어지러운 수많은 가능한 원인 중에 몇 가지를 추린 정도고, 그에 준하여 증상을 완화하는 대증 치료를 하고 있었는데 이 놈에게는 도무지 해결이 안 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원인이 더 추려졌고, 회복 가능성이 없겠다고 결단을 내렸다.
온갖 나이의 말들이 내원하는 2차 말 종합병원인 이곳에서 근무한 기간이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곳에서 차가운 시체를 적지 않게 봐 왔다. 그 중에서도 오늘처럼 오랜 기간 치료하다 인도적 안락사를 택하는 날은 아무리 내가 말과 유대관계가 없었더라도 그 말에게 죄스러운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생과 사의 최종 결정은 신의 영역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이고 통계적인 수치를 증거로 '사'에 바늘이 기울어져 가는 말도 희박한 확률로 살아날 때도 있었고, 반대로 '생'에 강하게 기울어 있는 말도 갑자기 급사할 때도 있었다. 그 일반적이지 않은 영역 때문에 나는 아무리 근거에 기반한 판단일 지어도, 그 흑백의 판단에 대한 부담이 항상 든다. 그 판단은 그럴만했다고 아무리 자기 위안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밥 먹고 웃으며 하루를 마무리해도 사실 어느 날 밤이 되면, 문득문득 혹시나 나의 잘못된 작은 판단 하나가 잘못된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자책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오늘은 오랜 기간 했던 집중 내과 치료를 더 강하게 유지하더라도 해결이 안될 질병 같다고 말씀을 드렸고, 이왕 택한 거 고통의 시간을 줄이는 게 나은 방법이라 생각하여 휴일에 많은 사람을 고생시키는 무리를 해서 안락사를 단행하고 병인 감정을 위한 부검을 실시했다.
안락사 약을 주입하고, 몸속을 열어서 육안적 이상 소견을 확인하는 작업, 이상 조직 떼내서 검사를 의뢰하고, 치우는 과정도 나의 일. 바로 직전까지는 살리려고 애쓰는 사람이었다가, 이제는 심장을 멈추고 장기를 자르고 처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언제나 하드코어 하다. 일단 말이 사람의 몇 배가 되는 큰 덩치를 가지다 보니 시각 청각 후각 모두 꽤나 자극적이다. 사실 적지 않은 근무 기간 동안 이제는 익숙할 때 되었다고 여겼는데, 이렇게 며칠이 지나서도 두더지처럼 생각이 튀어나오는 걸 보면, '죽음'이라는 건 익숙하다고 말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오늘 이 녀석은 장간막에 바나나 송이 같은 종괴성 조직이 퍼져 있었고, 소장은 두껍고 충혈되어 있었다. 빈혈로 나머지 장기들이 창백한 모습을 보니 이 놈이 그간 얼마나 살아내느라 고통스러웠을까 미안했다. 차라리 미리 고통을 없애줬어야 했을까? 차라리 배를 미리 열어서 확인을 했어야 했을까? 왜 이 검사는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희망고문으로 치료 약만 많이 쓰고 관리자만 힘들게 오랫동안 끌고 간 게 아니었을까? 내가 논리적 사고력이 부족한가? 공부를 어떤 방법으로 더 해야 하나? 책과 논문과 경험의 간극은 어떻게 줄여야 하는 것인가? 경험만이 답이라 하기에는 무언가 더 나은 방법이 있지 않을까? 이런 류의 원색적인 고민과 질문 화살은 비단 오늘뿐만 아니라,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말을 대할 때마다 나에게 다가온다.
사실 수의사의 정신적 트라우마 관리에 대한 이슈는 해마다 커지고 있다. 전염병에 걸린 수백 마리의 가축을 살처분하는 분, 도축장에서 근무하는 분 들에 비할 수는 없다. 하지만 죽음을 맞대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압박감과 함께 살고 있을 거라 생각된다. 그저 내가 알아서 나를 보호하는 수밖엔 없다. 경마장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경주 중 사고를 당한 말을 안락사 하고 집에 퇴근하는 날에는 평소와 다르게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집까지 걸어갔던 기억이 난다. 그냥 걸으면서 풀도 보고 나무도 보고 하면서 가빠진 심장을 조금 무뎌지게 해야지만 집에 가서 아이들을 평소처럼 돌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오랜 해가 지났지만 나는 오늘도 피곤한 몸에도 집에 바로 못 들어가고, 누군가를 만나서 이런저런 넋두리도 하며 취기가 조금 오른 상태가 돼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내가 나를 위안하는 것 조차도 그저 정신승리 같아 싫은 날이 있다. 오늘 같은 날은 꿈에서라도 누군가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넌 잘 살고 있어'라는 토닥임을 받고 싶다. 내일 출근해서 아무 일 없다는 듯 다른 살아있는 말들 살피며 살아갈 나의 어깨가 더 가라앉지 않았으면 좋겠다.
R.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