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업일치를 꿈꾸는 당신에게
내가 죽고 못사는게 하나 있다. 그게 뭐냐고? 그게 내 남편이나 아이들, 또는 내 업인 ‘말’ 이면 뭔가 이상적이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생각만 하면 심장이 뛰고 또 보고 싶고 1초만에 나를 두근거리게 하는 것. 그건 바로 비밀스런 나의 덕질이다.
나는 한 뮤지컬 배우를 정말 좋아한다. 공연장에 어렵게 도착해서 시작을 기다리며 객석에 앉아있을 때 죽을만큼 설레인다. 나에게 그 배우는 꿈이고, 공연장은 이상향이다. 잘생겼는데, 음색도 좋고, 열정적인데 성품도 좋다. 아니, 솔직히 잘생긴거 하나로 바로 입덕했다.
일하지 않는 모든 시간 나는 그 배우의 음악을 듣고, 또 다음 공연을 기대한다. 아침에 동물병원에 와서 약을 뽑으면서 듣는 음악도 뮤지컬 넘버이고, 쉬는 날에도 늘 비슷한 영상을 보니, 아이들이 성악 발성 목소리만 나오면 질색팔색한다.
취향이 너무 독특하니 회사에서는 덕밍아웃을 한적이 없었다. 어느 날 입원말을 돌보는 실습을 하러 온 말 관리학과 만학도 대학생 한분을 만나기 전까지는.
시골 모자와 장화 착장의, 나보다 나이가 있어보이는 그녀는 그저 말이 좋아 제주에 내려왔고 말산업학과 새내기로 입학했단다. 우리 병원의 입원말 관리일을 잠시 돕는 실습공고를 보고 바로 달려오셨다는 그녀는 말 덕후 같았다.
그즈음 한창 동물병원이 바빴다. 마방 안의 오물 뭍은 깔짚을 항상 삽으로 걷어내는 모습, 말을 늘상 쓰다듬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녀가 말 덕후임을 확신했다. 어느 날 망아지 수술 후, 망아지가 마취에서 깨기를 함께 기다리며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왔다. 그녀가 함박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정말 존경스러워요. 말을 매일 보며 이렇게 다 치료해줄 수 있잖아요. 정말 부러워요.’‘
낯간지러워진 나는 그분께 제주에 내려오기 전에는 뭐 하셨냐고 물었다. 이내 나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저는 뮤지컬 음악감독이었어요.‘’
‘’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지금 이렇게 열심히 말똥 치우고 있는 분이, 브로드웨이의 뉴욕 유학파 출신 뮤지컬계의 거장이시라니! 더 이상 나에게 이 분은 말덕후 만학도가 아니었다. 내 이상향 세계의 천상인이 강림하셔 빛을 뿜고 계셨다.
나는 방언이 터지듯, 내가 좋아하는 뮤지컬들, 대학로 공연장들, 감명받았던 뮤지컬 장면과 넘버들을 숨도 안쉬고 오타쿠처럼 나열했다. 감독님은 뮤덕인 나의 갑작스러운 커밍아웃에 적잖이 놀랐다.
‘‘와, 저 뮤지컬 넘버 진짜 밤낮없이 들어요. 그런데 그걸 창작하시는 분이라고요? 와, 감독님 너무 존경스러워요. 공연장에 매일 있을 수 있고, 배우님들을 매일 볼수 있다니!! 혹시 제 본진 배우님 아세요? 정말 부러워요!.‘’
뮤지컬계에 있던 그녀는 내가 매일같이 보는 말에게 입덕했고, 제주까지 와서 말공부한다. 그리고 말동네에 사는 나는 뮤지컬에 입덕했고, 결국 나는 돈을 하늘에 뿌리며 대학로 소극장을 끊지 못하고 산다. 이건 하나의 평행세계 같았다. 그녀의 일터가 나에게는 천상세계였고, 나의 일터가 그녀에게는 천상세계였다. 알고보니 서로가 서로의 세계를 동경하고 있었다. 우리는 신기해서 그저 웃었다.
내가 감독님에게 물었다.
‘‘감독님, 극에 음악이 어떻게 그렇게 잘 맞아 떨어져요? 감독님은 천재처럼 그 악상이 막 떠오르는거죠?’’
감독님은 모든게 철저한 계산이라고 했다. 어쩔 때 관객이 놀라고, 어쩔 때 관객에게 감동이 오게 하는지에 관한 음악적 공식이 있으며 그에 맞게 곡을 짜는 것이라고 했다. 감독님의 대답은, 깔끔한 트리플악셀의 감동 뒤에, 철저한 이론과 기법이 있고, 그걸 무수히 반복했을 뿐이라는 김연아 선수의 인터뷰를 떠올리게 했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말 치료는 철저히 공식대로 한다. 나 역시 이성적으로 배우고 무수히 연습한대로 대입하며 치료법을 익힌다. 감독님은 뮤지컬을 사랑하고 나는 말을 사랑한다. 하지만 업이 덕질이라고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이러니하다.
감독님은 언젠가 '말‘이 주인공인 ’창작뮤지컬‘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나는 눈이 똥그래져서 물개 박수치며 말했다.
’‘감독님! 그 뮤지컬에 제 본진 배우님 주연으로 꼭 뽑아주세요. 그리고 그 뮤지컬 진짜로 흥해서 대배우님으로 성장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우리는 우리만의 덕업일치 이상향을 그려댔다. 서로의 영역을 동경하며 꿈에 취한 채로 대화를 잇다 보니, 마취에서 망아지가 깼다. 나도 마치 마취에서 깬 것 같았다.
내가 매일 반복하며 만나는 내 사람, 매일 반복하며 하는 내 일이, 누군가에게는 죽고 못사는 이상일 수도 있다는 엄청난 깨달음의 날이었다.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덕질에 가슴뛰는 이유는 뭘까? 내가 덕질하는 배우의 공연스탭이었다면 내가 그 때도 죽고 못살까?
결국 나에게 덕질이란 완전무결한 이상향을 동경하는 것이었다. (잘생김으로 유혹당한 건 부정 못하지만.) 그리고, 나에게 일상이란 무던하고 당연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신이 인류의 심장 보호를 위해서, 찬란한 일상에는 심장이 안정적으로 뛰도록 마법을 부려놨나보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이면을 안다. 편안한 내 사람, 단단한 내 일상도 누군가의 덕질 대상었음을. 내 남편, 내 아이, 내 업도 내 덕질 대상이었으니 나와 만났고, 이렇게 매일 함께 살아가고 있었음을 상기했다.
모든 것은 누군가의 이상향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나와 만난 내 삶의 그것들을 끊임없이 고귀하게 여기고 아껴줘야 함을 느낀다. 반복이 결국 완전함으로 가기 위한 바퀴라면, 나는 그저 충실히 행해줘야 하는게 예의이자 나의 쓰임새 같다.
어쨌든간에 여전히 감독님은 오늘도 말을 만지고, 나는 오늘도 음악을 흥얼대고 있을 것이다. 여전히 누군가는 어디선가 빛을 뿜고, 누군가는 하트 눈으로 풍덩 빠진다. 어쩌면 여기, 이 세계 자체가 천상세계인지 아무도 모른 채로 우리는 빛을 동경하며 살아가는 중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