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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에서 만난 엄마

by 말자까


여행은 내 삶의 반경에서 평생 만날 수 없을 사람과 공명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 기회로 나는 미국 엄마 Jeanette을 내 인생에서 만나게 되었다. 입사 10년 차 즈음 나에게는 해외 연수 기회가 주어졌다. 6개월간 미국의 한 대학에서 전공 분야를 수련하는 기회였다. 외국에 한번 살아보고 싶은 게 어렸을 적부터 큰 로망이었다. 그런데 그 기회가 하필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쁜 시절에 던져졌다. 아이 육아에 정신이 없었고 대학원도 다니고 있었다. 외국 생활의 로망을 가족과 함께 하고 싶었으나 개인적인 여건상 도저히 불가능했다. 조직에 순응하던 나는 고심끝에 반년 간의 혼자 미국 살이를 선택했다. 그 시절 그런 결심을 한 나 자신과 나를 보내준 남편의 결정으로 미국 엄마를 만나게 될 지 그 때는 상상도 못했다.

가족과 함께 해외연수를 오는 대부분의 직원들은 가족과의 추억을 쌓느라고 분주했지만, 혼자인 나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한국에서 나는 참 바빴다. 가족과 회사와 학교에서 나는 그에 맞는 역할 놀이를 회전문 돌듯이 쉴 새 없이 해야 했고, 각 역할에 만족했지만 항상 피곤한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철저히 혼자였다.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몇 주간 아무 말도 안 하고 혼자 지낼 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게 마냥 좋았다. 가족과 영상통화를 하며 웃으며, ‘사랑해. 빠빠이’를 말하다가도, 영상통화를 끄면 그 즉시 살림 걱정 없이 바로 편안하게 침대에서 뒹굴 수 있는 정당한 잉여로움이 행복했다. 하지만 그 정당한 잉여로움은 한 3개월 정도 지나니 서서히 적막한 잉여로움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미국의 한 대학 동물병원의 외과 파트에 속해 있었지만, 그저 잘 구경하고 눈치껏 배우기만 하면 되었다. 딱히 책임이나 역할은 없는 외국인인 내가, 바쁜 그들의 삶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일은 꽤 어려웠다. 원래 남에게 궁금한 게 별로 없는데 안 되는 영어로 겨우 겨우 말을 걸어도, 바쁜 그들의 답은 길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점점 말수가 적어졌고, 그 외로움을 집에 와서 나눌 사람도 없었다. 그러던 중 비행기로 두 시간 거리의 플로리다주 레딕이라는 마을에 있는 국제수의한방교육기관(Chi Universitiy) 주최의 말 침술 전문 자격(CVA) 이수 교육을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소 그 분야에 관심이 많고, 적적하기도 했던 나는 즉시 신청했다.

교육 과정은 길지 않았으나 나는 그곳에서 침술 전문말 수의사들을 개인적으로 따라다니며 더 자세히 배우고 싶었다. 그러려면 한 달 넘도록 묵을 숙소가 필요했는데 아무래도 에어비앤비가 가장 저렴했다. 일단 근방의 가장 저렴한 숙소를 찾아 며칠 예약했다. 나의 소속 대학교에 허락을 받고 플로리다주로 떠나는 그날은 할로윈 즈음이었다. 아기자기한 마을은 집집마다 호박을 포함한 알록달록한 데코레이션으로 장식을 하고 전구를 밝히고 있었다. 나는 마치 렌터카를 타고 축제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해가 지면서 하늘은 로맨틱하게 물들어갔고, 예쁘장한 집들 속에서 특히 아담한 전구로 밝힌 마지막 집이 내비게이션 최종 종착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딱 거기까지가 설렘의 끝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는데 대답이 없었다. 메일로만 약속을 해서 집주인 연락처를 찾아 급한 대로 메시지를 보냈는데 답이 없었다. 이게 신종 사기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에어비앤비의 흉흉한 기사들이 갑자기 떠올랐다. 한참을 집 앞에서 기다리니 주인아주머니가 차를 타고 오셨다. 미안하다고 하며 집 문을 열어주셨다. 그런데 문을 여니 집 안 거실에는 성인 아들이 이미 있었다. 투명한 흰 피부의 아들은 머리가 여자처럼 길었고 덩치가 컸으며 내 눈을 마주치지 않고 게임 삼매경이었다. 내 방은 거실에 붙은 작은 방이었는데 방문이 미닫이 었고, 심지어 반투명이어서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지 않았다. 나는 거실에서 헤드셋을 쓰고 게임만 하며 눈도 마주치지 않는 덩치 큰 그 아들이 무서웠다. 문을 잠그지 못하는 그날 밤 나는 설쳤고, 낭만적인 전구와 할로윈 장식은 나를 잡아먹는 괴기스러운 괴물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며칠을 지내보니 다행히 처음의 내 생각은 기우였다. 주인아주머니에게 다음날 잠금장치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니, 다행히 기분 나빠하지 않고 시건장치를 마련해 주셨다. 다소 히키코모리스러운 아들의 야밤의 게임소리가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게 다였다. 아주머니는 동양 여자가 말의 침술을 배우러 이 시골 마을까지 온 것을 몹시 신기해했다. 이내 자기가 아는 말을 소유한 사람이 그 교육기관 근처에 집이 있으며, 침술 요법에 큰 관심이 있다고 했다. 며칠 후 그 지인이 나를 원하는 기간 동안 저렴한 가격으로 묵을 수 있게 방을 내주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말을 키우고 있는 집이라는 점과, 나에게 먼저 꺼낸 호의가 신기했다. 몇 번의 메일을 주고받고, 페이스북으로 신상을 대략 파악하고 나니 안심이 되어 제안을 수락하게 되었다.

나는 더넬론에서 레딕이라는 마을로 다시 홀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아기자기한 집이 모여 있는 빌리지가 아니고 집 한 채에 넓은 초지가 둘러쌓여 있는 듬성듬성한 시골 마을이었다. 비포장길을 한참 달려서 나온 Jeanette의 집은 사방이 초지였고 말이 살고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니 뚱뚱한 얼룩 강아지 한 마리가 잽싸게 다가와서 꼬리 치며 킁킁대며 나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흡사 미국 드라마의 세트장 같았다. 넓고 모든 것이 적당하게 장식된 집의 내부, 바비큐 가 가능한 테라스와 야외 소파, 커다란 창고와 차고지, 마구간, 집 주위의 넓은 초지, 그리고 캠핑카까지 있었다. 좁은 손님방이라 미안하다며 보여준 방은 공주 침대 같은 높은 프레임 기둥 때문인지 한없이 고풍스러워서 나에게 과분해 보였다. 이보다 좋을 게 없었다. 이 집은 70대의 노부부 Jeanette과 John이 사는 집이었다. 그들은 나에 대한 호기심이 정말 많았다. 내가 왜 여기에 오게 되었으며, 한국에서는 뭘 하며, 가족은 어떻게 되는 것이며, 말의 침술을 왜 배우려는 것이며, 매일매일 듣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 드디어 청중이 생긴 나는 어리벙벙했다.

낮에 교육 일정을 마치고 오후에 집에 들어오면 여지없이 Jeanette은 환한 미소로 문을 열어줬고 차린 게 없다고 했지만 미국 남부 가정식은 샐러드 토마토 하나까지도 맛있었다. 천천히 저녁을 먹으며 그들은 내가 오늘 뭘 했는지 물었다. 더듬더듬 설명을 해도 환한 리액션으로 웃어주며 내 눈을 지그시 바라봐 주었다. 아무래도 종일 나를 기다린 것 같았다. 그렇게 매일 저녁을 따뜻하게 보내면서 그때부터 나는 영어로 말을 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지며, 의사소통이 한결 자연스러워지게 되었다. 미국의 대학병원에서 보릿자루 역할을 했던 내 캐릭터는, 이곳에서는 수다쟁이 캐릭터로 점점 변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분명히 어색한 영어로 주절거렸을 텐데, 그걸 다 진득하게 들어주고, 무슨 말을 해도 잘한다고 칭찬해 주는 이분들을 만난 건 내 미국 연수생활 최고의 행운이었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매일 그 집 개와 말을 만지며 함께 놀았다. Jeanette은 침술 공부를 위해서는 뭐든 시도해 보라며 허락해 주신 덕분에 그 말을 교보재 삼아서 혈자리를 열심히 익히고 공부해서 결국 침술전문의 자격증을 따게 되었다.



미국 대학병원 속의 냉랭함 속에서는 하루하루가 참 길고 적막했는데, 이곳 플로리다에서는 비현실적으로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어느덧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는 집들이 많아지는 시절이 다가왔다. 한국에 갈 시간이 다가옴을 서로가 알고 있었다.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우리는 서로 자꾸 이벤트를 만들었다. 어떤 날은 내가 김밥을 만들어 주겠다고 해서 Jeanette이 옆집 친구까지 초대했는데 맛이 너무 이상해서 다들 웃음보가 터진 날도 있다. 또 어떤 날은 플로리다에 와서 아직 바다를 한 번도 못 본 내가 불쌍하다며, 주말에 가까운 바닷가로 나를 데려가준 날도 있었다. 신이 나서 뛰어다니는 나를 휴대폰으로 열심히 찍어주며 맛있는 해산물과 함께 한 즐거운 날이었다. 그런데 헤어지는 날 그 사진들을 다 인화해서 넣은 사진책을 안겨 주신 덕에 나는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 그들은 정말 나를 딸처럼 여겨주셨고, 어느새 나는 미국 엄마, Florida Mom이라고 Jeanette을 칭했다. 그 품에서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헤어지는 마지막 날 나는 꼭 한국에서 내가 초대할 기회를 갖게 해 달라고, 우리 가족들 보러 꼭 오라고 몇 번이나 약속을 받고 아쉽게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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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 미국 엄마 집에서의 몽글몽글한 비현실적인 추억이 여전히 내 미국 연수 기억 전체를 지배한다. 다행히 나는 아직도 Jeanette을 페이스북에서 만날 수 있다. 벌써 8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내 생일이 되면 항상 축하 메시지를 보내주고, 나는 그들의 건강한 안부에 매년 감사한다. 사실 해외연수 전 내 머릿속은 자격 획득이라든가, 연수 후 조직에서의 인정이라든가 하는 것들로 옹골찼다. 그래서 기어코 혼자 떠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8년이 지난 지금, 그 당시 내가 그리 바랐던 조직의 인정이나 지위 같은 것은 어디론가 흘러가 버렸다. 하지만 미국 엄마 Jeanette은 내 머릿속에 항상 존재해 있고, 나는 지금도 마음의 고향 플로리다의 그 집도 여전히 내 가슴속에 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참 강렬한 공명이었고 여전히 생생하다. 어느 저녁 우리는 식사 후 와인 한잔씩 따라서 야외 테라스에 나가 앉았다. 적당한 취기와 함께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코끝으로는 앞에서 졸고 있는 말 냄새가 살짝 올라오고 하늘은 끝도 없이 맑고 푸르렀다. 가끔 깍깍 거리는 새소리만 들려왔다. 알싸한 공기의 12월의 크리스마스를 향해가는 그 저녁에 우리는 딱히 무슨 말을 하지 않았고 그저 그 시간이 아름다움을 서로 느끼고 있었다.

여행에서 만나게 된 상호간의 팍 튀는 공명은 어쩌면 모든 게 선택의 결과로 생긴 신의 장난 같기도 하다. 내가 혼자 미국에 오지 않았다면, 미국 대학 생활에서 외롭지 않았다면, 플로리다에서 열리는 침술 교육과정을 신청하지 않았다면, 에어비앤비로 할로윈 그 집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 집주인이 미국 엄마를 소개해주지 않았다면, 당연히 나는 플로리다 미국 엄마 집 테라스에서 와인을 먹으며 함께 하늘을 보는 순간이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나는 내 인생의 수많은 선택의 결과로 나온 귀한 어느 순간을 소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매 순간은 소중하다. 하지만 주파수가 맞는 그 순간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모른다. 그곳이 남미 페루일지도, 아프리카 탄자니아 일지도 모른다. 주파수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맞을지 모르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찾기 위해, 때때로 본인의 반경을 떠나 보는 미지로의 여행을 흠모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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