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10월 하늘 구름
자신만의 비상식적인 믿음이 있냐 하고 묻는다면, 나에게는 10월의 기적이다. 이상하게도 해마다 10월에는 굵직한 일들이 열매를 맺는 사건들이 있었고, 그런 상황의 반복이 이제는 나만의 신념이 되어버려서 10월 달력이 보이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기대감에 벅차고 하루하루를 더 굳건히 견딜 힘이 차오른다. 그리고 10월의 멋진 날에 가사를 흥얼거리며 보내다가 또 그 다음 해를 또 기다리게 된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어린이날을 기다리고,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것 같은 같은 느낌이랄까?
사실 그 배경에는 계절적 풍요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어느 지역이나 멋진 가을은 오겠지만, 10월의 제주는 내 기준으로는 정말이지 아름답고 유독 경이롭다.
평소에 집 밖에 나설 때에는 습관적으로 한라산을 가장 먼저 쳐다보는데, 그 어떤 기후 어플보다 백만 배 직관적이고 정확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올해는 유난히 장마와 태풍이 쉴 틈 없이 제주를 감싸서, 하늘을 봤을 때 한라산이 보이고, 심지어 우리 집 앞으로 엄청 가까워진 날은 참으로 드물어졌다. 이런 날에는 어디든 튀어 나가서 저 햇살과 건조한 바람을 온몸으로 환영하는 게, 귀하게 온 날씨의 손을 잡아주는 최소한의 예의인 것 같기도 하다.
세상 모든 것을 다 바친 듯한 풍광
늘상 희뿌옇던지 구름에 가리던 한라산이, 10월이 되어 내 집 앞에 성큼 다가와 주는 선명한 날이 오면, 내 심장은 좋아하는 사람을 마주친 양 마구 뛰며 설레기 시작한다. 한라산이 손에 닿을 만큼 다가와서 뚜렷한 능선과 색채로 자태를 뽐내고, 북쪽 수평선은 평소에 보이지 않던 섬들의 라인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바다색은 여름과 다른 파스텔 동화책 같은 색감을 비춘다. 그러다 해가 질 때는 구름과 수평선의 색깔이 정말 초 단위로 바뀌면서 세상에 이런 오묘한 색깔이 있을 정도가 있나 싶을 정도의 조화를 불꽃놀이처럼 뽐내며 사라진다.
제주의 가을 하늘은 특히, 구름이 하늘 높이 보이지 않고 수평선 따라 바닥으로 깔리는 날이 많다. 그럴 때에는 흡사 내가 저 높은 하늘 위에 있는 둥둥 떠 있는 어느 땅에 살고 있는 것 같아 몽환적이기도 하다. 영화 '날씨의 아이'에 나오는 그 형언할 수 없는 다양한 하늘의 색감이,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한 하늘에 대한 최고의 찬사 같았는데, 나에게는 10월의 제주 하늘이 어쩔때는 심지어 영화보다도 훨씬 더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진다. 1년에 단 며칠,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는 듯이 피어나는 화려한 꽃처럼, 세상 모든 것을 다 바친 듯한 압도적인 풍광에 벅찰 때 나는 이를 어떻게 저장하고 기억해야 할지 고민스러울 지경이다.
10월이 빛나는 이유
10월이 이렇게 매력적인 건, 사실 그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흐리고 희뿌연 평상시의 무미건조한 날씨가 되돌아온다는 현실일 것이다. 매 순간이 이렇게 미친듯이 빛난다면 그 역시 일상이 되어 결국 '탈감작'이 될테니 말이다. 사실 나의 삶도 그런 것 같다. 사실 늘상 지루하고 노력은 무의미 해지며 빛이 보이지 않는 회색의 날이 더 많다. 삶은 그저 부족한 것만 눈에 보이고, 내 언저리에는 참아야만 하는 재미없는 보따리들만 던져져 있는 것 같다. 그런 대부분의 시간 속에 문득 눈이 번쩍 띌 만한 선물이 오는 날이 있다. 나에게는 희안하게 그게 10월에 자주 온다는 정형화된 기대감이 있어서 그렇지만, 눈에 번쩍 띄는 네잎글로버야 뭐 각잡고 자세히 뒤지면 언제든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좋은 가을 전국 어딘들 좋지 않으랴마는, 눈만 올려뜨면 바람 따라 매우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모양을 바꾸어 대는 뭉게구름과 함께 할 수 있는 제주에서 매일 매일을 맞이할 수 행운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나는 그저 눈과 귀를 활짝 빛낸 채로 창문을 열고 슬그머니 와버린 투명한 하늘 냄새를 킁킁 맡으며 오롯이 나만의 10월의 기적을 간직하려 애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