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니 ADHD더라 (5)

4. THE MATRIX (Feat. 빨간약)

by AIDNHF DJ

끊임없는 안갯속.

뒤에는 건물만 한 공이 나를 쫓아오고 있고, 나는 그 공을 피해 달리고 또 달린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어느덧 숨은 턱 끝까지 차오르고, 공이 나를 덮으려는 순간.

나는 잠에서 깬다.


이 꿈은 어렸을 때부터 현재까지 나를 지겹도록 괴롭힌 꿈이다.


지금은 꾸는 빈도가 줄었지만, 정신없이 달리다가 깨면 그 끈적끈적한 안개가 아직도 나를 감싸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안개가 내 머릿속으로 침투하기 시작했고 내가 사유(思惟)하는 모든 삶에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 이게 흔히 말하는 브레인포그(Brianfog)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삶의 시간이 거듭될수록 머릿속 안개는 더 짙어져만 갔고, 그에 따라 내 눈도 죽어갔던 것 같다. 그렇게 안개와 30년을 함께하여 오늘이 되었다.


병원에서 회사로 복귀하여 주차장에 차를 댄다.

사무실로 올라가기 전 사이드 미러를 통해 내 눈을 쳐다본다. 내 눈에 흠칫한다.

내 눈은 흔히 말하는 죽어있는 눈이다.

c72af248ef1a439d43266755fe6d91089c00819b.jpg 대충 이런 느낌이다.

어렸을 때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사슴 눈망울 같다는 말도 많이 들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총포사 한편에 박제되어 있는 사슴 눈이다.


또 다른 말로, 동태눈깔이라고도 한다. 아니 이제 나는 동태 눈빛으로 하자. 언젠간 유행이 될 눈빛이 되기를 바라며.


동태 눈빛을 들어 손에 있는 약을 쳐다본다.


하얀색, 파란색, 노란색. 형형색색 이쁘게 있지만,

아쉽게도 빨간색은 없다.

빨간약이 있었으면 영화-매트릭스처럼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줄 선택권 같은 기분을 낼 수 있었을 텐데.


매트릭스는 아직도 한번씩 곱씹어 보는 영화이다.

가끔 내가 키아누리브스(매트릭스 주인공)이었다면, 어떤 약을 골랐을까? 생각해 보는데, 나는 무조건 파란 약선택 파다.

통속의 뇌든, 뭐가 되었든. 내가 있는 곳이 삶이다. 거짓된 삶이든. 진실된 삶이든.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곧 나인데 힘든 길을 가고 싶지는 않다.


데카르트도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 형태가 무엇이든.


사실 키아누리브스도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을 경험하는 선택지가 아닌 파란 약을 먹고 행복한 선택지가 있었다면, 그걸 고르지 않았을까?

슬픈 이야기지만 그 서사가 매트릭스의 스토리를 한층 업그레이드시킨 느낌이다. 지금은 다시 좋은 사랑을 찾으신 것 같지만. 아 또 쓸데없는 생각. 행복하길 바란다.


각설하고, 다시. 약을 쳐다본다.

묘한 기대감이 샘솟는다.


찌익. 손쉽게 약봉지가 찢긴다.

내용물을 손에 가볍게 털어주고. 입으로.

그리고 물 한 모금. 약이 기도를 타고 넘어간다.


오오. 머릿속이 번쩍하며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한다. 안개가 걷히며 내 눈이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

는 것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약효가 빠르게 나타나면 오히려 무서울 것 같다. 거의 마약 수준 아닌가?


핸드폰으로 가볍게 약의 부작용을 찾아본다. 혹시라도 갑자기 회사에서 쓰러지면 곤란하니. 약의 부작용이 나타 날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회의실로 가 119에 신고하려고 한다.


긴장. 흥분. 불안. 메스꺼움.

다행히 기절 같은 일은 잘 일어나지 않나 보다.


좋아. 만반의 준비를 했으니 이제 가볼까.


짐을 챙겨 차에서 나온다. B3. 평소와 똑같이 엘리베이터를 타려다 계단을 올라볼까 생각한다.

신진대사를 빠르게 만들면 약효를 빨리 돌게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계단으로.


지하에서 위로. 첫 발을 내딛는다.


B3... B2 여기까지는 무난하다. 쉽게 통과.

B2.. B1 그래도 군대를 다녀온 남자로서 이 정도야 가뿐하지.

B1.. 1 살짝 콧김이 세졌지만 애써 무시한다. 오르는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1... 2 슬슬 숨이 헉한다. 허벅지에도 살짝 느낌이 온다. 저질 체력.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2.. 3 무언가 이상하다. 세상이 밝아진다. 눈이 초점이 맞는다. 세상이 고요해진다.

4. 도착. 어두웠던 비상계단을 지나 출입문을 연다.


문을 열자 햇살이 나를 비춘다. 눈부시게.

다시 눈을 들어 햇빛을 쳐다본다.


햇살이 정확히 보인다. 햇살에 정확히 보인다 라는 말이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근데 나는 지금 말할 수 있다. 햇살이 정확히 보인다고.


노란색과 붉은색의 계통의 색을 띠며 우리에게 비타민 D를 제공하는 햇빛. 단언컨대, 오늘 이 햇빛이 내 삶 중에 가장 아름다운 햇빛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군대 제대하는 날 집으로 향하며 받았던 햇빛보다 더.


사무실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소리가 들린다. 원래도 들렸지만 지금에서야 들린다.

이것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명확히 말할 수 있다. 이건 소리가 정확히 들리는 것이라고.


단언컨대, 나는 지금 인생 최고의 경험을 하고 있다.

내게 기억은 없지만 애기 때 엄마 몸을 해치고 나왔을 때 그 느낌일 것이 틀림이 없다.


내 자리로 향한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더 세상이 뚜렷해지고 명확해진다.


자리에 앉아 잠시 내 손을 바라본다. 그리고 쥐고 편다. 쥐고 편다 라는 느낌. 내 몸이 움직이는 느낌이 이런 거였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앞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본다.

검은 화면에 내가 비추어져 보인다.


언제나 봐왔던 그 모습이 어색하다. 모니터 너머에 그에게 물어보고 싶다.

이제야 내가 너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걸까?


어쩐지 모니터 안 그의 눈이 눈이 반짝이는 것 같다.

검은 화면에 색이 있을 리 없지만, 분명 반짝였을 것이다.


정확한 햇살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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