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Lucky&Loki Day (운수 좋은 날)
시간이 흘러 다시 금요일이 되었다. 13일의 금요일.
오묘하게 맞아 들어가는 날짜다.
13일의 금요일은 영화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어원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노르드 신화에서 12명의 신이 초대된 신들의 잔치에 불청객인 13번째 손님이 등장했는데 이 손님이 바로 장난의 신 로키(Loki)여서 생겼다는 말이 있다.
나에게도 이 장난의 신이 올지 모르겠지만, 불청객은 틀림없는 듯하다.
삶이 무난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무난하게 살아오고 있던 나에게 찾아올 13번째 손님.
그 정체를 오늘 확인하러 갈 때이다.
예약은 10시. 운전대를 잡고 집에서 일찍 출발한다.
병원에는 가급적 늦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돌아다니는 인터넷에서 ADHD 특으로 약속을 못 지킨다는 글을 봤기 때문에다. ADHD이길 은근히(?) 기대하고 있지만, 그래도 부정적인 면모를 보이기는 싫다.
약속을 못 지키는 것은 ADHD고 아니고를 떠나서 별로인 인간 군상은 맞기 때문에.
그것이 어떠한 병을 가지고 있다고 용인되지 않기를 바란다.
병원을 가기 전 피앙세를 먼저 회사에 데려다준다.
곧 정신병자 3이 될지 모르는 나와 함께 있는 고마운 친구다. 내가 ADHD가 의심된다고 했을 때 웃어넘기지 않고 병원도 찾아주는.
만약, ADHD임이 밝혀지면 이 영광을 나의 피앙세에게 바치리.
마음속으로 굳은 각오를 다지며 움직이다 보니, 어느덧 병원에 도착한다.
다시 이 자리, 문을 연다.
'띠링'
역시나 청명한 소리가 나를 반긴다.
"안녕하세요."
"아, OOO님 맞으시죠? 잠시 앉아서 기다리세요"
오늘은 내가 1호인 듯하다.
아무도 없는 공간이 흡족하다. 엘리베이터에서도 혼자였고, 내가 10층을 누르는 모습을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전체적으로 느낌이 좋은 날이다.
꼭 운수 좋은 날처럼.
"OOO님, 들어가실게요"
잠깐 기다리니 금방 호출이 된다.
1주일 동안 이 만남을 얼마나 고대했던가.
하늘에 맹세코 수능 성적표보다 더 기대했던 것 같다. 사실 이게 맞는 걸지도 모른다. 불과 19년의 삶 후에 알게 되는 내 꼬리표와 30년 후 알게 되는 꼬리표 중, 더 흥미 있는 건 당연히 후자 아닐까?
문 앞에 서 문고리를 쳐다본다. 저번에 위로 돌렸는지 아래로 돌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보통 위로 돌리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내 머릿속은 지금 엉망진창이기에 위로 2번을 시도한 후에야 아래로 돌린다.
역시 문은 묵직하다.
좀비 때가 왔을 때 이 문 뒤에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들어가니 선생님이 웃는 얼굴로 반겨 주신다.
"안녕하세요"
"네 OOO님 어서 오세요. 한 주 잘 지내셨나요?"
"네. 뭐.. 똑같이 지냈습니다."
"저번에 검사한 결과가 나왔는데요. 검사 결과를 보고 놀랐어요."
올게 온 건가? 생각보다 더 정신이 이상했던 건가? 묘한 자부심이 올라온다.
역시 난 이상한 놈이었어.
내 오묘한 표정을 읽은 건가 선생님이 황급히 말을 덧 붙인다.
"아 뭐 이상하다는 게 아니고요. 지능이 굉장히 높게 나오셨어요. 아마 직장생활은 문제없으셨을 테고, 크게 살아가는데도 큰 문제는 없으셨을 거예요. IQ 검사해본 적 있으신가요?"
"아.. 네. 학창 시절에 130 정도 나왔던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이런 분들은 지능발달검사로로는 판단이 어렵긴 해요. 물론 다른 유형에서도 지능 검사는 참고할 뿐이지 ADHD를 판단하는데 주가 되지는 않습니다."
선생님이 모니터로 내 성적표를 보여주신다.
"여기 보시면, 모든 영역에서 다 결과가 높게 나왔어요."
대견하다는 듯이 말씀해 주신다. 칭찬은 나이 30을 먹어도 듣기 좋다.
"전반부 쉬운 문제에서 점수가 낮은데, 오히려 어려운 문제가 나올수록 점수가 높게 나오고 있어요. 또 각 구간 별로 수행 수준 변동이 크지 않아 안정된 것으로 보이네요"
내가 뭐 아는 것은 없지만, 결과지만 봤을 때 ADHD 하고 거리가 멀어 보인다. 각오를 다지고 왔는데 각오가 무색해지는군.
나이 30의 작은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었던가. 그래도 아직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제 다음 결과인데요. 자율신경균형 검사에서도 모두 정상 소견으로 나왔어요."
여기도 정상. 이것저것 말씀 해주셨지만 결론은 정상인 듯하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워질 것 같은 느낌.
그리고 다음 화면.
사람 머리가 주르륵 나열되어 있는 것 보면 대망의 뇌파검사(QEEG)인 듯하다.
초록 사과, 초록 사과, 초록 사과, 빨간색 물든 사과, 새빨간 사과.
사진을 보는 순간 집으로 가는 발걸음에 족쇄를 차게 생겼다 했다. 문제가 한눈에 보이네.
초록색 좋은 거, 빨간색 안 좋은 거.
그리고 Beta. High Beta 쪽이 새빨간 거 보니 저 사과는 잘 익은 듯하다. ADHD 스럽게.
저 익은 머리가 나라는 게 문제지만.
"네, OO님 뇌파 검사 결과입니다. 뇌파검사는 뇌에 자극을 주어 반응을 측정해 보는 건데요. 앞에 낮은 자극에서는 문제가 없으나, 높은 자극에서는 반응이 높게 나타나고 있어요. 그게 Hihg Beta 쪽에서 보이는 결과고요. 이 부분은 불안 장애가 있을 때 발생합니다. 그래서.."
네 선생님. 이제 저 빨간 사과 대가리에 판결을 내려주시죠.
"심한 편은 아닌데, 이 부분도 고려가 필요합니다. 이 전에 같이 상담한 내용과 같이 고려해서 처방을 내리려고 해요. ADHD는 맞는 것으로 보이고요. 일단, 맞는 약을 찾아가는 게 중요해서 저용량부터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두둥. 빨간 뇌파 사이로 로키가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결국 너 오고야 말았구나. 토르에서 꽤 좋아하는 캐릭터였는데.
"ADHD는 보통 유전적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고요. 혹시 가족 중에 동일한 질환으로 보이는 분이 있으신가요?"
아 있다. 내 친아버지. 나랑 닮았지만 닮지 않은. 내가 닮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우리 집을 구렁텅이로 빠뜨린 사람. 지금은 잘 살고 있는지도 아닌지도 모르는 사람.
이 외에도 온갖 미사여구가 아닌 미사여구를 붙여 드릴 수 있지만, 그래도 미워하지는 않는다. 그냥 그런 사람이었고, 세상에 사람은 다양하니까.
그냥 타이밍이 그랬을 수도 있고. 일이 잘 안 풀렸을 수도 있다. 그 사람이 라고 잘 살고 싶지 않았겠는가.
다만, 유전이라는 말을 들으니 불쌍한 생각이 든다. 이 시대에 태어나서, 진료를 받고 자신을 알아갔으면 조금 다른 세상을 만들어 가지 않았을까?
"네. 생각나는 분이 계시긴 하네요."
"네 그래도 심한 편은 절대 아니시고, 심리검사 결과로도 정말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건강한 마인드를 가지고 계세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약으로 고쳐 나가 봅시다. 일단 아토목이랑 메디키넷 처방해 드릴게요. 그리고.."
선생님한테는 이전에도 가정환경에 대해 얼추 말했기에 어느 정도 이해하신 듯하다.
이후에 내 불안도가 높게 나온 건 만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증상 같다고 한다. 이에 관련해서도 약을 하나 추가해 주시겠다고 했는데 아마 우울증 약인 듯하다.
이 부분도 나한텐 꽤나 놀라운 일이었는데, 사실 나는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고 모든 일은 다 지나가고 이길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힘든 건 잠깐. 어차피 지나갈 일. 못 이겨낼 일은 없다고 생각하며 꽤 건강한 마인드라 생각했는데.
그거 자체가 약간의 강박관념 같이 있었나 보다. 나를 보호하려는 방어기제였을 수도 있고.
뭐 문제가 있으면 고치면 그만. 아 이것도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건가?
그 뒤로 선생님과 조금 더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상담실을 나온다.
무언가 흥분되는 기분이 든다. 재미난 장난감 상자를 열어버린 듯이. 그런 거 있지 않은가.
한번 열면 더 이상 주워 담을 수 없는 상자. 마치 판도라의 상자 같이.
뭐가 되었든 나는 내 삶에 추를 달고 있었던 듯하다. 그럼 앞으로 나아질 일만 남은 거 아닌가? 더 빨리 알지 못한 거는 아쉽지만 앞으로 더 나은 삶이 있을 거라면 나쁘지 않다.
문제는 이미 발생한 상태이고, 그 문제를 해결한다면 나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대기실에 잠깐 앉았다가 이제 나와 함께할 친구들을 받는다. 내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줄 친구가 될 수 있는. 우리 함께 동고동락해보자.
소중히 받은 친구들을 패딩 주머니에 쑤셔 박고, 왠지 모를 기대감으로 문을 연다.
'띠링'
퇴장 알림이 이번에는 새로운 세상으로의 입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수레를 가득 채워 입구로 향한다.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30살 김첨지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