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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서율 May 05. 2021

쓸쓸한 날의 와인 한 모금

손원평 작가님의'아몬드'를읽고

요즘의 나는 씩씩하게 키토 식단을 하고, 요가를 하고, 어깨 마사지를 받고, 1년 반이나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통조림처럼 갇혀버린 섬나라에 살지만 나름 행복했었다. 이미 기억에서 지나가버린 지난 1년은 재택근무를 했으되 경험이 없어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는 생각에, 내 몸에 좋은 이것저것을 하며 연말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는데, 인도 및 주변 국가의 여파로 오늘 다시 새로운 거리두기에 대한 정책이 발표되었다. 이 나라의 정부는 정말 기습적이고, 여론 따위 신경도 안 쓴다. 그래서 통제권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억 속에 박제된 집 안에서 만의 생활, 사랑하는 요가를 갈 수 없음에 대한 괴로움, 어쩔 수 없이 일 끝나면 나가서 한 시간씩은 걸어야겠다는 다짐, 모임을 할 수 없는 아쉬움 등등. 하루 일과를 게걸스럽게 해치우고 기분 좋게 다녀오던 산책길이 뉴스로 인해 엉망이 되었다.


이곳의 상황은 어떤 면모에선 한국보다 나았을지도 모른다. 외식업계는 나름 호황을 누렸고, 섬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사람들은 본국으로 아주 귀국한 게 아니라면 나름 이 안에서 할 수 있는 활동들에 집중해서 다양한 취미생활 영위로 인한 내수 시장이 살아났다. 수입에 의존하는 나라다 보니 물류, 항만 사업 등이 작년에 이어 호황이었고, 대부분의 회사 일이 온라인으로 모두 이루어질 수 있음에 이곳에 있는 많은 다국적 기업들의 지사가 재택근무를 장려하지 않았던가. 서비스 업, 현장 근로 위주의 재택근무가 대부분 어려웠던 한국에 비하면, 지난 1년 동안 나는 출퇴근 시간을 절약하며 다만 혼자서 외로움과 싸우는 것만 잘했으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제 잠들기 전에, 이만큼 괜찮아진 상황에 감사해하면서 백신을 접종받고 한국에 갈 날을 고대했건만, 다시 한번 정부 정책으로 계획이 뒤로 미뤄져 버렸다. 어제 자기 전에 읽었던 글귀 중에 '고통이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고통을 붙잡고 있다 (석가모니)'는 말이 있었다. 한동안 나는 그 글귀를 보고 수만 가지 생각을 했다. 고통 속에 너무 오래 있었기에, 그게 익숙해서, 다른 곳을 보지 못하지 않았나. 근데 이제는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아니까 다행이다. 감사하고 기쁘다는 생각을 했었다. 오늘의 뉴스가 주는 찬물 정도야 내일이 되면 또 지나가리라 믿으며, 기도 후 아주 조금, 달콤한 핏빛 액체를 음미 중이다. 


이전만큼 자주 일어나 울거나, 깨거나 하지 않는다. 오늘은 오롯이 책을 한 권 읽었기에 몇 마디를 남겨본다. 감정을 느낄 수 없어서 타인을 더 투명하고 정확하게 바라보는 아이의 이야기인 '아몬드'를 읽으면서, 그 아이가 몸으로 부딪혀서 알아가는 감정들을, 세상을 보면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글도 생각이 났고, 글이 아니면 내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했던 학생 시절의 내 모습이 겹쳐졌다. 문장이 매끄럽고, 순식간에 읽히고, 문장 켜켜이 쌓인 사뿐함, 아름다움, 군더더기 없음 등에 감탄하며 단락을 읽어 내려갔다. 이전처럼 과거에 천착하지 않은 내 모습이 아몬드에 등장한 윤재, 곤이, 도라 세 명의 아이들 위에 겹쳐졌다. 결국 사람도 세상도, 순수한 마음으로 보려고 하는 만큼 보이지 않나 싶다. 사랑도 그렇게 순수하게 쉬운 것이었으면 좋겠다. 코로나가 공존하는 세상에서 진심이 잊히지 않기를,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인생이 너무 무너지지 않기를, 희망은 남아있기를, 그런 감상적인 생각을 해 본다. 


작가님 마지막 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타자 치는 소리 만큼이나 좋다. 


얼마동안이나 사회적 거리두기가 계속 될지는 모르지만, 작년에 쌓인 나의 감정의 잔근육들로 앞으로의 소중한 시간들을 긍정적인 나 자신으로 만드는 것에 쓰도록 하자며, 이미 나는 너무 많은 시간을 세상과 부딪히는데 소비했다며, 나 자신에게 소소한 위로를 건넨다. 며칠 뒤면, 집에 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는 내 생일이다. 좋아하는 양지머리 고기를 사다가 미역국이라도 푹 고아 먹어야지 하면서 다시금 잘 살고 있는 날 발견한다. 


추신 : 마리아주를 고려하지 않은 싸구려 편의점 와인이라서. 오늘은 안주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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