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사는 서른 세 살 앤의 마음을 사로잡은 두 명의 길버트.
개평론가입니다.
영어이름을 포함한 저의 모든 대외적 닉네임은 앤Anne이에요.
빨강머리앤에서 따온 거 맞습니다.
줄리엣에겐 로미오가 있고 바비에겐 켄이 있고 앤에게는 길버트가 있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 길버트의 캐릭터로 이상적인 남자상을 정립한 저는 그 벌을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다..
도통 눈에 차는 남자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는 서른 세살 마가 낀 앤의 마음을 사로잡은 또다른 길버트가 있었으니...
이름하여 '길버트 카플란 (A.K.A. 클래식 덕후들의 왕)'입니다. 영상 먼저 볼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A0SHrScuUos
뭐하는 양반이냐? 지휘자냐? 이 아저씨가 왜 클래식 덕후들의 킹이냐?
이 아저씨는
세계 150국에서 14만부 이상 팔리는 금융전문지 '인스티튜셔널 인베스터'를 발행하는
엄청 잘나가는 경영인이었습니다.
근데 마흔이 넘어서 갑자기 지휘자로 데뷔를 한 겁니다. 이게 뭔 일이냐.
1965년, 당시 23살의 경영대학원생이었던 길버트는
뉴욕 카네기 홀에서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하고
아메리칸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말러의 2번 교향곡을 듣게 되는데요.
바로 이 곡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hwQEbpVtxQ&t=2129s
23살의 길버트는 이 곡을 듣고
마치 수천 볼트의 번개가 몸을 통과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깊은 감동을 받았답니다.
그 날 이후 그는 언젠가는 반드시 이 곡을 직접 지휘하겠다는 꿈을 갖게 됩니다.
경영인으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가면서도
시간 날 때마다 피아노도 배우고 지휘 연습도 꾸준히 하죠.
그리고 드디어 1982년, 그는 말러 2번 교향곡 지휘 데뷔 무대에 섭니다.
아메리칸 심포니와 웨스트민스터 심포닉 콰이어와 함께 말이죠.
아마추어의 공연이기 때문에 사실은 공연 리뷰가 안 나올 예정이었는데요.
한 평론가가 이 데뷔공연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놀랍게도 길버트의 공연이 꽤나 들을만 했던 겁니다.
이후 여기저기서 카플란을 말러의 2번 교향곡 지휘자로 초청하기 시작한 거에요!
길버트는 카플란 재단을 만들어 장학금 시스템을 진행하고
구스타브 말러의 음악을 알리는데 힘쓰기 시작했고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비엔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말러 2번 교향곡 음반까지 녹음합니다!
놀랍게도 카플란의 지휘와 레코딩에 대해 평론가들은 많은 찬사를 보내줬어요.
길버트의 말러사랑은 이게 끝이 아닙니다.
그는 말러의 진짜 서명이 있는 악보를 손에 넣게 되는데요.
이 악보는 길버트가 세상을 떠난 후인 2016년 11월에
경매에서 비싼 값에 팔려나갑니다.
아니, 잠깐!
그가 세상을 떠났다고?
네 ㅠㅠ
길버트 카플란은 지난 2016년 1월 1일, 74세의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요.
뒤늦게 이 소식을 접했던 저는, 일면식도 없는 한 남자의 죽음임에도 눈물이 쏟아졌어요.
왜냐하면 길버트는 저의 영웅이었거든요.
사실 제게도 지휘자의 꿈이 있어요. 이 곡을 꼭 연주해보고 싶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uaYkpoOC3S4
이 곡은 영국의 합창 작곡가 존 루터의 대표작 '글로리아Gloria'입니다.
이 곡을 접한 건 제가 23살 때, 강남의 K모교회 성가대로 있을 때였어요.
개신교회에서는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늦은 밤,
'송구영신'예배라는 걸 드리거든요.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예배라 성가대는 보통 특별한 찬송곡을 부릅니다.
몇 달 전부터 아주 열심히 준비를 시작하지요.
처음 지휘자님이 성가대원들을 모아놓고 이 음반을 들려주셨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환상적인 선율에 매료되면서도
'이걸 우리가 부를 수 있다고?'라는 눈짓을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미 이 곡에 꽂혀버린 젊은 성가대원들은 '1일 1 글로리아 듣기'를 시행합니다.
출근하는 운전길에 듣다가 곡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만 울었다는 둥,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곡을 끝까지 들으려고 기다렸다 내렸다는 둥,
직장인 언니오빠들의 간증도 넘쳐났죠.
당시 휴학하고 까페에서 알바를 하고 있던 저는
홀로 일하는 밤 시간대에는 늘 이 곡을 틀어놓았습니다.
원래 그러면 안 되는데...연말이라 손님들도 좋아하셨어요.... (변명)
그렇게 존 루터의 음악 세계에 빠진 저는
그 날 이후 연말연초에는 1일1글로리아를 생활화하고 있습니다.
존 루터의 합창곡은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많이 알고들 계실텐데요.
https://www.youtube.com/watch?v=lZN1mryHEnQ
엘리자베스 2세의 60번째 결혼 기념일 때도 존 루터의 곡이 연주되었군요. 아름다워...
저는 죽기 전에 존 루터의 합창곡을 한 곡이라도 연주해보고 싶어요.
무려 17분에 달하는 합창대곡이 아니라도 좋아요.
막연하기만 한 이 꿈을 기억할 때면
늘 길버트 카플란도 같이 떠올립니다.
나보다 훨씬 바빴을 길버트도 했는데!
그보다 한가한 내가 왜 못할 것인가!
심지어 곡도 훨씬 짧고 쉬운데!
라고 생각하며 오늘도 글로리아 악보를 손으로 쓰다듬어 봅니다.
저는 이 순간도 길버트를 떠올립니다.
지금에 와서는 노인으로 치지도 않는 74살의 나이에 너무 빨리 가버렸지만
사는 동안 분명히 행복했을 한 남자,
꿈을 이룬 한 거룩한 덕후를요.
천국에서 말러와 길버트는 절친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