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평론가입니다.
오케스트라 연주에서 지휘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들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주 솔직히 저는 그 말을 그리 신뢰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악보 똑같고 악기구성 똑같은데 뭐가 그리 달라질까 싶었거든요.
물론
포르테(세게)인 부분 피아니시모(아주 여리게)로 칠 수 있고
빠른 부분을 좀 느리게 연주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곡의 본질이 바뀌겠나, 이렇게 생각했었습니다.
(역시 무식하면 교만해!!!)
그런 생각을 송두리째 바꿔준 사건이 있었으니..
때는 바야흐로 작년 4월 교향악 축제 때의 일입니다.
교향악축제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https://www.youtube.com/watch?v=4d3Duq7OLqY
한마디로 국내 최고의 오케스트라 축제입니다.
전국의 오케스트라와 활발히 활동하는 연주자들의 콜라보를 볼 수 있는데다
티켓 가격이 상당히 저렴하여
주머니가 가벼운 저같은 클래식 애호가들이 1년을 손꼽아 기다리는 그런 축제에요.
작년에 딱 30주년을 맞이한 터라
교향악축제 전야제도 하고 (다녀온 사람이 별로였다고 함)
아시아에서 가장 잘한다는 대만국가교향악단도 부르고
이것저것 많이 신경을 썼더라구요.
게다가 클래식 덕후들을 모두 놀래킨 소식
대만교향악단과
지휘자 샤오치아 뤼와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1번을 공연한다고?!!!!!!!!!!!!!
백건우 선생님은 많이들 아시지만
샤오치아 뤼는 잘들 모르실 수도 있겠네요.
뤼 선생님. 프로필 사진 다시 찍으셔야겠어요..
샤오치아 뤼는
1988년 28세의 나이로 브장송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그랑프리
1991년 안토니오 페드로티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도 우승,
그리고 1994년 키릴 콘드라신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머쥐며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레전드 옵 레전드 지휘자입니다.
원래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시작한 피아노에도 애정이 깊었답니다.
결국 음악을 하기로 결심한 샤오치아 뤼는
미국 인디애나 음대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공부한 뒤
콩쿠르에 도전하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트리플 그랑프리를 달성한 겁니다.
이렇듯 클래식의 메인 스트림에서 제대로 인정받고
지금까지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샤오치아 뤼와 백건우 선생님을 한 무대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모두 쾌재를 불렀던 것입니다.
(두 분 실제로도 친하시답니다)
게다가 백건우 선생님은 교향악 축제에 처음 나오시는 거거든요.
게다가!!!!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1번이라니.
https://www.youtube.com/watch?v=HcsZcbaCxTI
명실상부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의 버전으로 청해듣겠습니다.
이 버젼은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아요.ㅠㅠ
정말 아름다운 곡인데
국내에서는 생각보다 실황으로 연주된 적이 별루 없어요.
그래서 더욱 기대를 했죠.
그리고 연주회 당일,
민들레처럼 하얀 머리를 하고 나타나신 백건우 선생님은
피아노에 앉자마자 첫 타건부터 강렬한 감동을 선사하시며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을 열광의 도가니탕으로 만들어버리셨습니다.
샤오치아 뤼가 지휘하는 대만국가교향악단도 어찌나 연주를 잘하던지요!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건
대만국가교향악단의 연주 사이사이 존재하는 무음(침묵)의 순간이
너무너무 깨끗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무대에서는 무음(침묵)의 순간도 다른 버전의 연주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 역시 작곡가와 지휘자의 의도에 따라 만들어진
어떤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케스트라가 훈련이 잘 되어있고
지휘자와 깊게 교감할수록
무음의 순간이 아주 깔끔합니다.
합창단에서 서보신 분들은 이 이야기를 좀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텐데요.
지휘자의 지휘에 맞춰 노래를 시작하잖아요?
노래를 끊을 때도 그냥 호흡이 부족할 때 제멋대로 끊는 게 아니라
지휘자가 신호 줄 때 끊어야 되는 겁니다.
똑같이 소리를 끊어야 무음의 순간이 아주 깔끔해집니다.
만일 몇 십명이 소리를 끊는 타이밍이 제각각 다르면 노래는 엉망이 되겠죠?
무음의 순간도 아주 지저분할 거고요.
오케스트라의 연주에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되는 것입니다.
백건우 선생님의 연주가 끝나고
20분의 인터미션 동안
예술의 전당 화장실은 흥분과 기대에 찬 관객들의 속삭임으로 가득찼습니다.
줄 서 있는데 다들 어찌나 기대에 찼던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괜히 웃음이 났어요.
그런데 사실 그럴만도 했어요.
왜냐하면 인터미션 다음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비창'이었거든요!
당시 저의 마음은 이랬습니다.
'인터미션 전에 이렇게 놀라운 연주를 보여줬으니
차이코프스키의 비창교향곡은 얼마나 잘할 것인가.
저렇게 무음의 순간을 잘 살리는데, 비창 교향곡 4악장은 얼마나 기가 막히게 살릴 것인가.
으악.. 빨리 듣고 싶다...
으악...손수건 3개 챙겨오길 정말 잘했어.
4악장에서 아주 그냥 눈물 콧물 쏙 빼고 집에 가야지'
였습니다.
그러나 샤오치아 뤼는 제게 엄청난 배신을 때리고 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편에. 히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