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평론가입니다.
샤오치아 뤼에게 뒤통수 맞았던 썰을 이어 풀어보겠습니다.
일단 차이코프스키의 비창교향곡을 먼저 들어보시죠.
명불허전! 정명훈 지휘자와 서울시향 버전으로 들어보시지요.
https://www.youtube.com/watch?v=yDqCIcsUtPI
클래식을 잘 모르시는 분들이라도
차이코프스키는 아실 겁니다.
'비창'이란 교향곡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어보셨을 거고요.
(정식 명칭은 6번 교향곡이지만 그냥 '비창'이라 부릅시다)
비창교향곡은 차이코프스키가 죽기 며칠 전 완성한 곡입니다.
그런 일화가 주는 아우라 덕도 봤겠지만
곡 자체만 두고 보아도 정말 비통하고 아름답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창작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할 교향곡을 쓰고 싶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는데
이 교향곡이 바로 그 작품이거든요.
비창은 차이코프스키의 6번째 교향곡입니다.
그의 이전 5개 교향곡은 물론 아름답지만 전형적인 작품이었어요.
우리가 클래식의 교향곡이라고 하면 쉽게 떠올릴 만한 구성이요.
1악장은 힘차게 시작하다 2악장에서 살짝 느려지고
3악장에서 우아함의 절정을 찍고 4악장에서는 폭발하듯 힘찬 피날레.
뭐 그런 거 있잖아요.
근데 비창은 안 그래요.
4악장이 제일 우울합니다.
심지어 끝날 때도 힘찬 피날레 따위 없고
페이드 아웃 되면서 끝나요.
그래서 비창 4악장 끝나고 박수 칠때는
바로 박수치면 완전 '클알못' 취급받습니다.
8초 기다렸다가 쳐야 됩니다.
지휘자가 팔을 내려놓기 전까지 박수를 치면 안돼요.
그리고 그 룰을 전세계 클래식 팬들 중에서 제일 잘 지키는 건?
바로 서울시향의 팬들이에요.
몇 년 전 정명훈 선생님이 지휘한 비창 실황을 보러갔었는데요.
서울시향 관객들한테 반하고 왔잖아요.
정말 정확하게 8초동안 곡의 여운을 만끽하다가
작곡가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에 대한 경의를 담아 박수를 치셨단 말예요.
박수가 왁자지껄하지가 않아요. 으악...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해?!
박수가 경건하고 정중했어요. 박수까지도 음악이었다고요!! (흥분)
박수소리를 듣고서야 눈에 눈물이 고인채
소년처럼 웃었던 정명훈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눈물이 그렁한채
소년처럼 열렬히 박수를 치던 제 옆자리 노신사분의 모습,
지금 쓰면서도 제 눈시울까지 괜히 뜨거울 정도로 아름다운 기억이거든요.
비창을 악장별로 조금 더 자세히 볼까요.
비창의 1악장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비극의 전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보통의 교향곡들이
1악장에서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그리고 귀에 딱 꽂히는 메인 선율을 들려주는데 반해
비창은 1악장부터 너무 어둡습니다.
2악장도 1악장보다 우아하고 조금 밝아지긴 하지만
그래도 어둡고 조용한 분위기를 여전히 유지하다가
3악장에서 갑자기 확 밝아집니다.
마치 촛불이 완전히 꺼지기 전에
갑자기 찬란하고 아름답게 확 밝아지는 듯한 느낌이에요.
3악장 후반부에서는
심벌즈 등 타악기가 가세하고
춤곡 리듬이 더해지며
이보다 더 화려하고 흥겨울 수 없게 격렬하게 끝이 납니다.
마치 일반적인 교향악의 피날레같은 느낌으로요.
그래서 비창에 대한 사전정보가 없는 분들은
저도 모르게 3악장에 박수를 치기도 해요. ㅋㅋㅋ
꼭 끝나는 거 같그든요.
그걸 싫어하는 지휘자도 많아서
3악장과 4악장 사이에
쉴 틈을 거의 두지 않고 바로 시작하는 경우도 많아요.
이걸 가리켜 아타카Attacca라고 해요.
그리고
대망의 4악장이 시작됩니다.
4악장은 Adagio Lamenntoso입니다.
해석하면 '슬픈마음으로 느리게'
방금 화려함의 끝을 달렸던 오케스트라가
비통한 마음을 담아 연주하는 걸 볼 때면
언제나 목뒤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요.
그렇게 비창 연주를 실제로 많이 봤는데도요.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샤오치아 뤼의 비창은 3악장에서 조금 차이가 났습니다.
조금 누르고 있다는 느낌?
4악장의 비통함은
3악장의 화려함이 클수록 더욱 강조되기 때문에
보통의 경우 3악장은
일부러 절제하지 않고 마구 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샤오치아 뤼의 3악장도 아름답고 화려했지만
뭔가, 백퍼센트 다 내뿜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았단 말예요.
이어 드디어 4악장이 연주되었는데요.
어엇?

뭔가...비통하지 않아...
비통하기는 커녕
뭔가........
희망찬 이유는 뭐지?!!!!!!!!!!!!!!!!!!!!!!!
분명 아름다운 연주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기대했던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슬픔은 1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뭐지? 뭐지? 뭐지? 하는 가운데 4악장이 끝나버림. ㅠㅠ
여담인데
사실 저는 그 당시 사랑 때문에 마음 앓이를 심하게 하던 터라
4악장을 들으며 한바탕 울고 힘을 내고 싶었습니다.
그런 날 있잖아요.
너무 힘들면 아예 슬픈 영화보고 감정의 바닥을 찍고 올라오고 싶은!
그래서 손수건도 3개나 싸갔었지요. 울 작정을 하고 간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진짜 웬만하면 클래식 공연장에서는 맨날 울거든요.
그런데 샤오치아 뤼가 저를 배신해버린 겁니다(?)
눈물이 한 방울도 안 나옴..
당시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제가 이런 멘트를 했습니다.
"샤오치아 뤼가 비창 4악장을 새마을운동송으로 만들었다'고요.
(다른 패널 분은 해석이 신선해서 좋았다고 그를 옹호하셨죠)
암튼 그 날 저는 너무 화가나서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는데
예당에서 강남역까지 그냥 뛰어갔습니다. 우산없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쪽팔리네요. 중2병이 아직도 낫지 않았어...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며칠 지나고 분노가 가라앉고나니 문득 너무 신기한 겁니다.
멜로디도 악기구성도 똑같은데
단지 지휘자의 지휘 때문에
그 비극적인 곡이 희망가로 바뀌다니요????!!!!
물론,
지휘자의 해석에 따라 같은 곡이라도
천차만별로 바뀔 수 있다는 이야기는
그 전에도 입으로 나불나불댔었어요.
뭔가 잘 아는 양 말이죠.ㅋㅋ
하지만 내심 '그래봤자 뭐 얼마나 바뀌겠노'하고 있었단 말예요.
근데 그 기적같은 변화를 제 눈과 귀로 경험해버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소름...
그 이후 연주회를 가는 즐거움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게 커졌습니다.
이전에도 알던 곡이
지휘자에 따라 오케스트라에 따라
전혀 새롭게 들리는 걸 경험했어요.
심지어
같은 지휘자와 같은 오케스트라가
같은 곡을 2일 연속 공연해도
곡 해석이 전혀 다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ex. 2일간 진행된 DG120주년 갈라콘서트에서 브랑기에의 '비창' 지휘)
그러고 보면 샤오치아 뤼에게 뒤통수를 맞은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네요.
클래식으로 배운 새옹지마라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