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평론가 일기] 날카로운 인생 첫 연주회의 기억

동갑내기 바이올리니스트 김수연에게 보내는 연서

by Anne

개평론가가 옷을 차려입고 음악회를 갔던 최초의 기억은 2010년 23살 때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2010년 4월 9일

예술의 전당에서 진행했던 교향악축제 무대요.


백살까지 산다고 해도 그 날을 잊을 수는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인생에서 처음 독립한 지 딱 3일 되는 날 연주회를 갔거든요.

퓨리탄 가정에서 20여년 살다가 처음 독립한 건데

사실 독립이라기보다는 가출에 가까운 것이었어요.


지금도 기억납니다.

함께 사는 언니가 잠에서 깰까봐

소리를 죽여가며 울었던 그 밤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 벌이를 스스로 했던 터라

저는 스스로를 독립적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부모의 품에서 떨어져나와

생계를 위한 비용을 버는 것은 물론이요

요리, 청소, 고지서 요금 내기, 수도꼭지 고치기 등

수많은 일상의 잔업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해내야 한다는 사실이

비로소 실감이 나기 시작했고요.

이제는 부모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겁났습니다.


3일 동안 울고불고 했더니

본능적으로 ‘이렇게 집에 틀어박혀서 있어서는 안돼!’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추리닝과 티셔츠 외의 몇 벌의 옷만 챙겨나온 저는

이대 앞 보세옷가게에 가서 1만원짜리 분홍색 긴 자켓을 샀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감고 옷을 차려입은 다음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습니다.




2010년 4월 9일의 공연 프로그램은 이거였습니다.


수원 시립 교향악단 (지휘: 김대진)

김성기: 관현악 '길'

펠릭스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협연: 김수연)

요하네스 브람스: 교향곡 제1번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의

말쑥하게 차려입고 행복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섞이니

이상하게 기운이 났습니다.


다소 짧은 첫 번째 현대곡이 끝난 후

무대 위로 바이올리니스트 김수연이 걸어나왔습니다.

김수연2-700-700-438x438.jpg

그것이 저와 그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날 김수연이 연주했던 곡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Op.64.

흔히 베토벤, 브람스, 차이코프스키의 곡과 함께

가장 많이 연주되는 바이올린협주곡입니다.

강렬하고 아름다운 첫 멜로디를 한 번 들은 사람은 절대 이 곡을 잊지 못해요.

어린 시절. 정경화 선생님의 버전으로 늘 들어왔던 곡이기도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gGPCZ-n9Pc


동영상 혹은 음반으로만 늘 들어왔던 곡을 눈 앞에서 라이브로 듣는 감격이라니요!


통통한 볼을 한 앳된 얼굴의 바이올리니스트는

침착한 모습으로 꽤나 묵직하게 연주했습니다.


마치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를 눈 앞에서 보는 느낌이었어요.

그 나무를 보는 것만으로도

조급하고 무거웠던 마음이 가라앉고

누군가 제 어깨에 손을 얹고 ‘다 잘될 거야’라고 속삭여주는 느낌이었습니다.




연주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바이올리니스트 김수연에 대해 검색했습니다.


87년생, 나와 같은 나이.

2003년 레오폴드 모차르트 콩쿠르 우승.

2006년 하노버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 우승,

독일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선생님이 ‘젊은 거장’이라고 인정했을 정도로

깊이있는 곡 해석을 보여주는 라이징 스타.


그 순간 저는 지금 돌이켜봐도 굉장히 오글거리는 결심을 하게 되는데요.

그것은 바로

‘동갑내기 수연이(어느 새 혼자서 친구먹음)도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나도 지지말고 열심히 살아야겠다!!“였습니다.


그 때부터 수연이에게 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살았습니다.

힘들 때면 수연이의 공연을 보러갔지요.


신기하게도, 대단하게도, 기특하게도, 질투나게도!

수연이의 연주는 해를 거듭할수록 기술도 깊이도 더해갔어요.

그걸 확인한 연주회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저는 혼자 “수연이에게 질 수 없어!”를 외치며

각오를 다지고는 했답니다. (섀도우 복싱이 따로 없다)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항상 그녀의 공연을 보러가고는 했어요.

잡지 기자로 일했던 첫번째 매체를 그만둘 때에도

저는 김수연의 바흐 무반주 전곡 리사이틀 무대를 보러 갔었습니다.


바로 이 무대에요.

https://www.youtube.com/watch?v=W-FwT06uAgg&t=577s


오케스트라나 앙상블 없이

너른 무대위에

홀로 바이올린 하나 들고

관객 앞에 서 있는 김수연을 본 순간

그냥 눈물이 나왔습니다.(감정이입)


생각해보면 이 공연 정말 어마어마한 기획이었어요.

보실래요?


<1부>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1번 G단조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1번 B단조

10분 휴식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2번 A단조


*60분 휴식*


<2부>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3번 E단조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3번 C장조

10분 휴식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D단조


저 10분 휴식과 60분 휴식은 연주자가 요청했다고 합니다.

현명한 선택이었죠.


저 60분 휴식 때문에 재미있는 풍경이 많이 펼쳐졌는데요.

김수연의 외로운 사투를 보러온 그녀의 수많은 팬들이

휴식 공지가 방송되자마자

일제히 우다다 뛰쳐나가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가그린을 하고 이에 낀 음식물을 빼고

감상평을 빙자한 수다를 떨고

티켓 사진(허세샷)을 찍어 SNS에 올리고

다시금 맘을 경건하게 한다음

객석으로 향하는 모습은

눈물나게 우습고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저는 두 달간 품안에 넣고 내지 못했던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그렇게 힘들었던 20대를 상상친구 수연이와 함께 보내고

일방적인 짝우정은 올해로 10년을 넘어버렸습니다.


33세 수연이는 현재 독일 명문 악단인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악장입니다.

33세 개평론가는 지금 인생에 여러모로 마가 꼈습니다.


힘껏 달리다 삐끗한 나의 인생

쓰러져 울기보다

주저 앉은 김에

우리 수연이 곡이나 천천히 듣고 일어나야겠다고 말하는,


언젠가 수연이랑 진짜 눈을 보며 인터뷰할 날이 올테니

글발을 날카롭게 단련해야 한다고 말하며

좋은 인터뷰들을 찾아 읽는,


주책맞은 동갑내기 친구가 있다는 걸

그녀는 모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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