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처음 몸담았던 매체는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독자를 거느린 '국민잡지'였습니다. (자부심)
그래서 다양한 나이대의 다양한 직접에 종사하는 인터뷰이들과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는데요.
한번은
나이 지긋하신 전문직 종사자 A와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유명인이라 신변 보호를 위해 이렇게만 표현하겠음)
본인이 몸담은 업종에서도 꽤 유명세가 있는 분이었고요.
클래식에 조예가 깊은 것으로도 알려진 분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몸담았던 잡지의 인터뷰는 2가지로 나뉘었습니다.
1) 잡지가 먼저 요청한 인터뷰 (피처 인터뷰 혹은 화보 인터뷰)
2) 인터뷰를 가장한 광고
A와의 인터뷰는 2번에 해당했습니다.
심지어 잡지 발행인과의 친분으로 성사된 인터뷰라서
잡지 발행인이 엄청 신경쓰는 인터뷰였습니다.
그런데 잡지 독자들이 바보가 아닌지라 광고용 인터뷰는 잘 안보거든요.
최대한 광고 티가 안나게
재미있고 자연스럽게 인터뷰를 쓰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A는 대중이 관심을 가질만한 여러 에피소드를 많이 가진 분이었기 때문에
광고 인터뷰라 하더라도 그런 에피소드를 섞어주면
재미있고 자연스러운 인터뷰를 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A는 사적인 에피소드를 풀기 싫어한다는 거였죠.
대중이 가장 재미있어할 만한 몇 가지 부분에 대해서는
아예 질문을 삼가달라는 사전 요청까지 받았습니다.
인터뷰가 진행된 곳은 레스토랑이었습니다.
녹음기를 틀어놓은 채로 식사를 하며 인터뷰가 진행되었습니다.
식사 이후 인터뷰 시간이 따로 잡혀있긴 했지만
뭔가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유연해질 것 같아 사전에 양해를 구했죠.
저는 일부러
A의 오래된 클래식 취미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문을 던졌는데요.
소년 시절 좋아했던 성악가가 누군지 묻자
A는 머뭇거리며 "릴리 폰스"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바로 한마디 농담을 던졌습니다.
"아이~ 얼굴 보고 좋아하신 거 아니에요?!
릴리 폰스가 누구냐고요?
아름답죠?
https://www.youtube.com/watch?v=DZjwRN6v9bE
노래도 엄청 잘함.
릴리폰스는 1920년대 활발하게 활동했던
프랑스 출신의 소프라노입니다.
원래는 피아노를 전공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 발리에테 오페라 극장에서 성악가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1929년 뮐루즈에서 오페라 <라크메>의 주인공 역할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193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1931년 메트로폴리탄오페라단의 오디션에 합격한 후
첫무대인 오페라 <루치아>로 이름을 떨쳤어요.
이후 아름다운 비주얼과 고음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실력으로
미국 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유명세를 떨쳤답니다.
다시 A와의 인터뷰로 돌아가면,
하늘의 도우심으로
저는 릴리 폰스가 1920년대부터 70년대까지 활동했던
아름다운 리릭/콜로라투라 소프라노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지한 A의 태도도 명확하게 바뀌었습니다.
"기자님이 클래식을 좀 아시는구만.
클래식 잘 안다고 하는 사람도 기껏해야 마리아 칼라스 정도 알던데"
여기서 제가 한 번 더 굳히기 들어갔습니다.
"릴리폰스를 좋아하시니 칼라스보다는 테발디를 더 좋아하실 것 같은데요
테발디는 또 누구냐고요?
레나타 테발디.
마리아칼라스와 같은 시기에 활동하며
최대의 라이벌로 꼽혔던 소프라노입니다.
바로 이 분이에요.
https://www.youtube.com/watch?v=IYE99lyfzrw&list=PLpurKVE3ER1PyTyO2nMGY4xLA5Tvj2p-Q
클래식 잘 모르시는 분들도 마리아 칼라스는 많이들 들어보셨죠.
마리아 칼라스가 명성이 높은 이유는
가창력도 가창력이지만
뛰어난 곡 해석력과 폭넓은 배역 소화력,
무대 위에서의 카리스마를 꼽을 수 있을 겁니다.
배역에 빙의한 듯한 마리아 칼라스의 연기를 감상해보시죠.
https://www.youtube.com/watch?v=S1PnVd1YXvc&t=628s
다만
사람마다 기준과 취향이 있겠지만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톤 자체는
흔히 말하는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 '천상의 보이스'와는 거리가 멉니다.
반면 레나타 테발디는
정석에 가까운 아름다운 목소리와 뛰어난 가창력으로 주목받았던 소프라노입니다.
그래서 A에게 릴리 폰스의 팬이었다면
칼라스보다는 테발디가 더 취향에 맞으셨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던 것이지요.
그쯤 되자 A의 마음은 활짝 열렸고 ㅋㅋ
그 이후로 인터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사전에 질문하지 말아달라고 했던 내용도 다 여쭤봄 ㅋㅋ
그리하여 인터뷰 기사는 잘 나왔고
잡지 발행인은 대만족 하시며
윗분들의 식사자리가 있을 때마다
그렇게나 인터뷰 기사 칭찬을 하셨다고 합니다ㅋㅋ
그래서 편집장님도 칭찬받고
저도 칭찬받았다는 뭐 그런 이야기 입니다. (급 마무리)
아, 그리고 제가 릴리 폰스를 어떻게 알았냐면
대학교 교양수업 때 과제로 성악가들에 대해 다룬 책을 읽었거든요 ㅋㅋㅋ
교양 수업의 저력을 너무 무시하지 마이소.
그때 얻은 지식들이 생각보다 쓸 데가 많다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