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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g Jun 19. 2021

엄마 할래, 직장맘 할래?

흔하디 흔한 직장맘이라지만

 인터넷 사이트 회원가입을 하거나, 설문 조사서를 작성할 때 직업란을 보면 ‘엄마’라고 적고 싶었다. 엄마나 주부들에게 기본적으로 배정된 노동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 다만 ‘직장맘’과 ‘엄마’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처지였기에 직장맘보다는 엄마가 하고 싶었다. 그저 조막만한 아이를 태어나게 했으니, 그에 따른 엄마로 살고 싶을 뿐이었다. 직장맘으로 직장에 있는 시간이 너무 길었고, 엄마로서의 시간이 너무 짧았다. <나는 워킹맘입니다>, <워킹맘을 위한 초등 1학년 준비법> 같은 ‘워킹맘’이란 단어가 들어간 육아서만 읽었다. 다른 육아서는 ‘36개월까지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 ‘방과 후 엄마와의 시간’ 같은 내용이 나오면 서글퍼져서 책을 덮었다. 책은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단 한 시간이라도 아이에게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이미 삐뚤어진 나는 그것도 힘든데 어쩌란 말이냐며 누구의 위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 학부모 반모임이 있다는 것을 인터넷 맘카페를 통해 알았다. 아이 하원을 직접 시킬 수 없어서 다른 학부모들과 스칠 일이 거의 없었다. 단톡방과 반모임에 초대되기까지 만  일 년이 넘게 걸렸고, 가끔 그 모임에 나가기 위해 귀한 휴가를 사용했다. 점심시간을 포함하여 3시간 정도였는데, 동시에 마구 말하는 엄마들 사이에서 입을 꾸욱 다문 채 고개만 끄덕이며 보내야 했다. 자녀 교육과 학원 픽업, 아이 등원 후의 시간 활용, 아이들 성장 후를 위한 재취업이나 창업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포함한 사소한 잡담들을 온몸으로 흡수할 듯이 집중했다. 현재 온전히 엄마로 사는 그들은 여유 있는 빛이 나는 얼굴로 내가 겪지 못한 또 다른 세상의 대화를 나누었다. 아이들과 가정을 잘 꾸리고, 당당하게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들이 너무 부러워서 나도 엄마가 되고 싶었다.


 사무실 복귀 시간이 되어 중간에 먼저 일어날 때는 몇 초간 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밖에 없는 민망한 처지이다. 3시간 동안 아이에게 딱히 해 준 것도 없는데 한껏 엄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사무실로 들어간다. 몇 시간 자리를 비웠으니 책상 위에 서류들이 쌓여있다. 전화를 해 달라는 다른 부서나 거래처의 메모를 확인한다. 부재중 전화가 많이 왔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사무실 전화기 버튼을 누른다. 미처 내역을 확인하기도 전에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업무에 대한 질문을 하고 답변을 하는데, ‘아 여기가 내 자리구나’ 싶다. 이렇게 내가 돌아오자마자 나를 찾아주는 사람들이 많다니. 평소에 그토록 듣기 싫던 전화벨 소리가 뿌듯하게 들리고, 부담스럽게 쌓여있는 계약서류들도 한 번 껴안아 본다. 모임에서 내어줄 정보가 없으니 아무 말도 못해서 그런가, 뭐라도 말을 하니까 살아 있음을 느낀다. 나는 일 잘하는 직원도 아닌데 엄마보다는 사무실 일을 그나마 더 잘 하니까 아무래도 엄마보다는 직장맘을 업으로 삼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주말에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잘 챙기는 엄마들을 보면 엄마가 되고 싶어 죽겠다가, 사무실 가서 인정받는 동료들을 보면 일잘러가 되고 싶어 죽겠는 것이다. 정체성 없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직급은 높아지고 업무는 점점 많아졌다. 다양한 일을 배우며 고달픈 일이 많아질수록 일의 재미도 커져갔다. 그렇게 일이 더 좋아질 무렵, 가정보육이 필요한 상황이 되어 육아휴직을 냈다. 정작 엄마가 되어도 난 아이에게 특별한 것을 해 주지 않았지만 행복했다. 아이가 많이 아프기 전에 미리 병원에 데리고 갈 수 있어서, 방과 후 놀이터에서 아이 자전거를 지키고 있을 수 있어서, 아침에 출근한다고 아이에게 먼저 등을 보이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렇게 엄마 자리에 적응하고 있는데 이제는 복직이 다가온다.


 육아휴직 초반에는 매일 밤 아이를 재우고 <골드맘 프로젝트>,<엄마표 사고력 수학>,<초등한국사>,<자연놀이>,<초등독서> 이런 제목의 강의만 보면 결제를 하던 내가 요즘은 시도 때도 없이 <일잘러가 되는 방법>,<프로일잘러 꿀팁>,<능력있는 중간관리자>같은 강의를 듣고 있다. 한 번에 두 가지를 못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아이를 조금씩 방치하고 있다. 복직을 위해 계획을 변경하거나 별난 결심도 하지 않았는데, 정체성이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건 이미 몸에 배었나 보다. 엄마에서 직장인의 자리로 건너가기 위해 몸이 꿈틀거리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엄마가 하고 싶니, 직장맘이 하고 싶니 하고 묻는다면? 코로나 덕분에 SNS에 입문했더니 엔잡러가 왜 이렇게 많은지 그 열정이 부럽고 존경스럽다. 이번엔 엔잡러가 되고 싶어 죽겠다. 한 가지도 제대로 못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해 놓고, 무급휴직이 길어져서 백수나 마찬가지인 처지에 그 힘들어 보이는 엔잡러가 하고 싶다니. 직업란에 오늘은 이 직업, 내일은 이 직업 기분에 따라 돌아가며 기재하는 날을 상상한다. 내 생에 다시 찾아올 것 같지 않던 마음의 여유라는 것이 그렇게 나도 모르게 슬금슬금 찾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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