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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g Jul 02. 2021

아들이라 안 되는 것들

남자가 삐지면 안돼!

 아이가 만 20개월이 되고 복직을 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친정엄마께서 아이를 봐주셨는데, 건강이 걱정될 정도로 너무 육아에 몰입하셨다. 항상 죄송하고 감사할 뿐이지만, 그렇다고 조손 양육 사이에 당연히 있을만한 모녀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이의 작은 행동이나 나의 사소한 말 한마디로 인해 친정엄마의 오해를 사기도 한다. 그에 따라 친정엄마의 스트레스가 가중될까 봐 걱정해야 하는 나에게는 정신노동이 하나 더 추가된 것이다. 그래서 나름의 원칙을 세웠으니, 「일체 아이 양육과 관련된 부정적인 말은 부모님께 하지 말자.」였다. 아토피가 심한 아이에게 군것질을 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면서 ‘할머니께서 주시는 건 먹어도 돼.’라고 하거나, 틱과 시력이 걱정되는 아이에게 “할아버지께서 틀어주는 TV만 볼 수 있어.” 등의 예외 조항을 붙이는 일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못 넘어가는 경우가 있었으니, “남자가 그러면 안 돼."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세 번 참다 네 번째에 꼭 폭발하고 마는 것이다. 특히 “남자가 그렇게 삐지면 안 돼! 울면 안 돼!" 이 말은 거의 매일 듣는다. 그러면 참지 못하고 "여자도 삐지는 건 좋은 행동이 아니야. 그리고 남자도 울어도 돼."라고 친정엄마를 기분 나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친정엄마의 목소리가 커진다.  "남자는 더 삐지면 안 돼!" 


 시댁에 다녀온 날이면 아이가 하는 말이 있다.

  "엄마, 할머니가 남자가 무슨 핑크색을 좋아해! 남자가 무슨 인형을 좋아해!"라고 하셨어. 

유난히 혀 짧은 소리로 나에게 전한다는 건, 본인을 비난하는 뉘앙스로 느꼈기 때문에 속상하다는 의미다. 할머니들은 엄마보다 훨씬 현명하고 아는 것도 많으시지만, ‘남자색, 여자 색, 남자 장난감, 여자 장난감이 구별되지 않는다’라는 것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어. 네가 말씀드리면 돼." 라고 말해준다. 그래서 다음에 시댁 가서 아이는 그렇게 말했고, ‘무슨 남자가 엄마한테 고자질을 했냐.’ 고 한 말씀 더 듣고야 말았다.




 ‘여자라서 얌전해야 한다, 소리 내지 않고 먹어야 한다, 위험한 것은 하면 안 된다, 몸가짐이 발라야 한다, 적당한 직업을 가질 만큼만 공부하면 된다.’ 고 남동생과 다른 것을 배웠다. 덕분에 먹을 때 소리를 내지 않는 재주가 있어서 직장에서 식사시간에 두 그릇을 먹어도 조금 먹는다는 오해를 받는다. 대신 음식 먹는 소리만 안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외의 소리도 밖으로 낼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부모님께 그렇게 배웠다고 모두 나처럼 자신감이 없고 기죽은 여성으로 자라진 않는다. 지금쯤 다른 누군가는 부모님께 빈정대는 대신, “그런 말씀들이 아이의 생각을 닫히게 하고, 가치관을 결정할 수 있어요. 우리 딸들의 더 나은 미래와, 우리 아들들의 건강한 감정을 위해 다양성을 존중해 주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말씀드리고 있을 것이다. 


 그저 나는 아이 교육에 대한 어떤 소신도 없이 딱 <82년생 공지영>만큼 받은 남녀 차별에 대한 서운함이 가슴속에 있을 뿐이다. 더불어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스트레스가 쌓여 소심하게 반항하는 중이다. 아들을 키워 보니, 딸 못지않게 아들에게 주어진 고정관념도 너무 가혹하게 느껴진다. 뭘 해도 귀여운 이 나이에 삐지지 말고 울지 말라니. 지금 안 울면 언제 울어 보겠는가. 물론 아들에게 삐지고 우는 것에 대하여 감정코칭을 해 주어야 더 좋겠지만, 내 널뛰는 감정도 어찌하지 못하는 엄마로서는 현실적으로 많이 어렵다. 내 아들에겐 삐져도 된다고, 울어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그 나이 때 안 삐지고 안 울면 언제 또 해보겠냐고. 고작 세대주라는 이유로 어깨가 무거운 우리 아빠와 남편은 마지막으로 울어 본 게 언제일까, 나처럼 혼자 차에서라도 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솔직히... 남편이 삐지면 그렇게 꼴 보기 싫으니, 어릴 때 실컷 삐져보는 게 어떨까 싶다.




 관찰력이 뛰어난 아이는 외할머니 댁에 갈 때마다 인테리어가 뭐가 바뀌었는지 구석구석 알아보는 재주가 있어, 외할머니를 즐겁게 한다. 한 번은 주방 인테리어를 바꾸셨을 때 이것저것 가리키며 질문을 쏟아내자 외할아버지께서 등장하시며 말씀하신다. 

  "남자가 주방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 주방 좀 그만 들어가."

귀엽고 예쁘다는 듯 웃으며 말씀하셨지만, 또 듣기가 힘들어 못 들은척 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아들이 소리친다. "할아버지는 뭐, 주방에서 밥 안 먹어?"

엄마가 바로 방에 뛰어 들어오시더니 속닥거리셨다.

  "야, 너 아들이 할아버지는 뭐 밥 안 먹느냐고 소리쳤어. 내가 아주 속이 시~원하다. "


 남편이 소주와 번데기 캔을 사들고 오더니, 마늘 어디 있어? 뚝배기는 어디 있어? 계속 묻는다. 결혼 9년 차인데, 왜 아직도 그것들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일까. 얼마 쓰지 않은 뚝배기를 버린 걸 알면 한 소리 들을 것 같아서, 그냥 내가 해 준다고 말하고 번데기를 끓이는데 아들이 가만히 보더니 남편에게 소리친다. 

  "엄마가 아빠 꺼 만들어주니까, 아빠도 엄마 꺼 하나 만들어 줘!“




  물론 올바른 성 역할을 가르친다는 것이 단순히 주방에서 누가 밥을 하느냐의 문제는 아니다. 집안일을 똑같이 나눠서 하는 게 무조건 공평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이의 그 말 한마디에 친정엄마의 오랜 체증이 내려가고 나는 지친 삶 속에서 위로를 받는다. 아무리 혼내도 잘 안 되는 아이의 존댓말을 비롯한 예절교육에 고민인 요즘이지만, 아이가 저런 말을 할 때마다 우리 아들은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될 싹을 보인다며 나는 또 멀리 나간다.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 역할을 배우는 것이 아내와 딸들에게만 좋은 세상은 아니다. 내 아들도 외롭지 않은 가정을 꾸리고, 성장을 계속 하며 살 수 있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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