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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g Jul 26. 2021

우연히 같이 일하던 국장님을 만나면

피하고 싶은 사람 핸즈 업!


 한의원진료


아이를 데리고 일주일에 두 번 한의원 진료를 간다. 직장에 다닐 때 병원을 꾸준히 데리고 다니지 않았고, ‘나아지겠지, 나아지겠지’ 하며 틱 증상을 일 년 넘게 방치한 적이 있다. 작년에 육아휴직을 시작한 후에 많이 좋아졌으나 틱 증상이 조금만 보여도 불안해서 바로 진료를 간다. 다녀 본 병원 중 한의원이 아이와 잘 맞는다. 비염과 천식이 심해지면 증상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경우가 많아서 비염 치료를 기본으로 생각한다. 한의원 2층에서 비염치료를 위한 침 치료와 레이저 치료를 하고, 다시 1층에 내려와 틱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추나와 운동치료를 한다. 어릴 때 늘 먹였던 항생제와 항히스타민제 및 스테로이드제를 그만 먹이고 싶은 생각에 한의원을 택하였는데, 다행히 아이에게 효과가 있다. 하지만 대기하느라 지친 데다 코와 머리에 침을 찌르고, 콧속에 면봉으로 약을 찔러 넣어야 하니 아이는 괴롭다. 핸드폰을 쥐어주기도 하고, 침을 중간에 빼지 않고 치료를 마치면 다이소에 데리고 가겠다는 약속도 한다. 그렇게 어르고 달램과 동시에 한의원 선생님들을 마주칠 때마다 인사하라는 잔소리까지 하고 나면 지친다. 1층에 운동치료를 받으려 내려갈 즈음엔 만사 귀찮고 세상 부정적인 기운 없는 여인이 된다.


국장님이다!


 오늘따라 대기가 길었다. 추나 베드에 누워 원장님을 기다리라고 했으나, 아이는 추나 베드를 다 분해해버릴 기세로 이것저것 작동해 본다. 사람들이 있으니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제지해야 한다. 마스크 위로 나온 두 눈과 미간 주름만으로 위협감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옆쪽으로는 수치료기라고 하는 물침대가 몇 개 있고, 그 위에는 보통 어르신들이 누워계신다. 나도 저기 누워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둘러보는데, 어라! 우리 국장님께서 물침대에 누워서 물리치료사와 대화중이다.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확실하다. 숱 많고 검은 똑 단발머리, 고음은 아니지만 귀에 박히는 깔깔한 목소리, 웃으면 더 진하게 보이는 눈매, 딱 봐도 국장님이지만 제일 확실한 건 옷차림이다. 저런 수박껍질색 바지 정장을 입으시는 50대 후반의 여성분은 바로 우리 국장님이 맞다.   


 


 기억 소환


 작년 3월 육아휴직을 들어갈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초등학교 입학하면 더 손이 많이 가니 잘했다고 하는 여직원들, 둘째를 가졌냐고 물어보는 남직원들, 평생 일해야 하는데 쉴 수 있을 때 쉬어두라는 선배님들, 아이들 학교 보내고 같이 브런치나 하자는 아이 친구 엄마들, 팀장님 때문에 힘들어서 그러냐면서 팀을 바꿔주시겠다고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신 과장님, 언니는 이제 일 안 해서 너무 좋겠다며 일하기 싫어 죽겠다고 말하는 결혼 안 한 90년대생 요즘 후배들. 휴직원을 내서 너네과를 발칵 뒤집히게 한 행정직이 누구냐고 나에게 묻던 옆 과 팀장님.


 그리고 저 국장님은 우리 과 직원들이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환하게 웃으시며 “휴직냈다며? 이제 일하기 싫지? 그치? 응? 그치?”라며 몇 번을 되물으셨다. 하지만 다행히 대답할 시간은 주지 않으시고 계속 되묻기만 하셔서 나도 같이 웃었다. 직원 스무 명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기에 보나마나 얼굴이 빨개졌겠다 싶었다. 내 성깔대로라면 얼굴이 화끈화끈해야 하는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건 그럴 만도 하시겠다 싶어서였다. 직원은 항상 부족한데, 내 빈자리는 인사팀에서 채워주지 않겠다고 했다.(16개월이 지난 지금도 충원되지 않은 상태이다.) 공석을 메꾸기 위해 자리를 옮긴 직원도 있고, 업무를 더 맡은 직원도 있다. 직원을 빼앗긴 팀의 팀장님은 죄송하다고 말씀드려도 끝내 눈을 마주치지 않으셨다. 자리를 옮긴 직원은 스트레스로 병가를 일주일 들어갔으며, 업무를 더 맡은 직원 둘은 함께 울었다. 그들을 보고 ‘라떼는 말이야, 일이 배우고 싶어서 업무분장이 결정되는 대로 그냥 따랐어.’라고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라떼도 말이야. 결혼 한 언니들이 내 옆에만 앉으면 그렇게 다들 임신을 해서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들어갔다. 나는 다산의 기운으로 직원들에게 축복을 내린 대가로 일복을 받았다. 참 열심히 했지만 왜 나만 피해를 보냐며 투덜댄 것도 사실이다. 그들의 반응이 나를 향한 비난이든 위로든 진심이면 족하다. 마음을 숨기고 나와 눈을 따듯하게 마주치고, 잘 다녀오라고 말한다면 더욱 무섭고 불안한 마음으로 헤어졌을 것이다.


 휴직 기간 내내 가슴에 품고 지낸 진심은 따로 있다. 우리 팀장님과 팀원들, 그리고 한팀처럼 지내던 옆 팀원들이다. 나의 휴직 고백을 듣고 업무가 걱정되어 밤마다 못 주무신다는 우리 팀장님께서는 업무에 대한 고충보다 나와 헤어지는 것이 싫다고 하셨다. 팀원들은 쌓여있는 정산서류를 나눠서 봐 줄 테니까 야근 좀 그만하라고 걱정해 주었다. 옆 팀원들도 바쁜 부서에서 휴직 들어가는 내가 미울 만도 한데, 이별의 아쉬움만을 강조했다. 휴직을 앞두고 그렇게 열심히 일 한 직원은 처음 봤다면서 나의 죄책감을 덜어주려고 애썼다. 그들은 진심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나 때문에 힘들어지고, 날 책망할 수 밖에 없는 직원들이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직원들에게 몇 배로 베풀며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 자신감과 용기의 원천이다.    




오늘의 뻘짓


 앗, 국장님을 잠시 마주친 바람에 생각이 많아졌다. 치료가 끝났는지 국장님이 일어나셔서 이쪽으로 걸어오신다. 늘 엉덩이는 내놓고 얼굴만 숨기던 우리 강아지처럼 고개만 삐딱하게 왼쪽으로 돌리고 빠르게 계산한다. 그냥 당당하게 인사를 할까. 아이가 아파서 지금 여기 있다는 걸 보시면 내 휴직이 조금 더 당당해질까. 나에 대한 미움이 측은지심이 될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야, 그냥 날 못 알아보시고 지나가셨으면 좋겠다. 국장님이 내 앞에서 마스크를 살짝 벗어 고쳐 쓰신다. 어머, 우리 국장님이 아니다. 잘못 봤다. 마스크 쓰니까 진짜 우리 국장님이랑 똑같네. 잠깐이지만 괜히 쓸데없는 고민만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뻘짓 한 건을 완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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