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엔 바쁘다는 핑계로 오랜 시간 함께 못 있는 아이와 카페에 갔다. 주말에는 핸드폰 게임과 카톡을 못 하게 막아놨더니, 아이는 칭얼대며 유일하게 되는 기능인 문자메시지 창을 열어 친구와 문자를 나눈다. 바로 옆에 있어서 흘낏 핸드폰 화면을 보았는데, 아이가 내가 문자 창을 볼까 봐 연실 내 눈칠르 본다. 유치원 때 한 반이었다가, 4학년 되어 다시 한 반이 된 여자아이와 나누는 문자다.
행복(여자아이) : 너 진짜 이번 주 일기에 나 쓸 거임? 단비(아들) : 글쎄. 아마도. 행복: 그럼 나도 일기에 니 쓸게. 단비: 그럼 나도 니 쓸게.
아이는 매주 주제 일기 숙제를 받는다. 이번 주 주제는 <내 친구를 소개합니다>이다. 그 주제로 매주말 만나서 노는 그 많은 남자친구들을 다 재끼고 서로에 대해 쓰기로 약속을 하다니 이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이 아이들 혹시 썸 타는 것인가 설레기 시작하는 내 마음은 길상효 작가의 동화 <깊은 밤 필통 안에서>에서 담이 손에 잡힌 채 서우에게 편지를 쓴 무지개 연필만이 알 것이다.
무지개 연필은 편지를 쓰고 온 후 말한다. "몇 글자 안 썼어. 특별한 내용도 없고. 근데 마음이 이상해......"
내 마음이 그랬다. 단 한 개의 문자를 옆에서 훔쳐본 것일 뿐인데 마음이 이상했다. 나에게 혀 짧은 소리로 엄마 엄마 하며, 목욕 후에 아직도 벌거벗고 다니는 저 아이가 여자친구를? 하지만 요즘 아이들이 빠르다는데 아무리 11월생이라 해도 4학년이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가 아닌가.
집에 오면 핸드폰 따위는 방치하는 아니기 때문에 몰래 문자를 보면 정황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아이 핸드폰의 비밀번호는 외우지는 못하지만, 메모장에 저장되어 있다. 하지만 왠지 보고 싶지 않았다.
가끔 남편이 목욕 중 욕실 앞에 던져둔 핸드폰에 계속 알람이 울릴 때 보고 싶지만, 보지 않는 것처럼. 남편 핸드폰의 비밀번호 역시 외우지는 못하지만, 아이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다.
평소에 대충 보고 마는 주간학습안내문 아래에 있는 가정통신문 내용이 유독 눈에 띄었다.
<학부모님께서는 주기적으로 학생들의 SNS 메시지_ 단체 카톡방 여부, 역할놀이, 친구들끼리 편가르기, 문자메시지 등_의 올바른 언어습관 사용 여부를 점검하여 네티켓 예절을 지킬 수 있도록 협조 부탁드립니다.>
학교에서는 개인정보보호 문제로 개별 사용 습관을 확인할 수 없으니 가정에서 철저하게 확인해달라고 하는데, 난 귀찮음을 넘어서 뭔가 보고 싶지 않은 걸 보지 않겠다는 이유로 아이의 핸드폰을 열어본 적 없으니 이 얼마나 무책임한 엄마였던가. 하지만 도저히 몰래 보고 싶지는 않아서 아이에게 말했다.
"단비야, 너 행복이랑 문자 나눈 거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여주면 엄마도 엄마 문자랑 카톡 보여줄게."
생각해 보겠다던 아이는 핸드폰을 열어서 보여준다.
행복: ㅁㅎ? 단비: ㅇㅉ 행복: ㅌㅂ 단비: ㅈㅉ 행복: ㅌㅂ
보통 이런 대화들이 가득했다. 번역해서 다시 쓰겠다.
행복: 머해? 단비: 어쩔 행복: 티비 단비: 저쩔 행복: 티비
흠... 간질간질하던 내 마음이 훅 사라지는 문자였다. 썸은 아니었나 의심하던 찰나, 아이가 말한다. "이번 주 주말은 행복이랑 놀아도 돼?"
아이가 주말마다 남자친구, 여자친구들과 약속을 잡아 놀이터에 나가는 건 일상다반사였지만, 이번에 왠지 느낌이 달랐던 남편은 남자가 가호가 있지 용돈 좀 평소보다 많이 주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뭔 말 같지 않은 소리냐며 무시한 나는 중간에 괜히 아이스크림이랑 과자를 잔뜩 사서 놀이터를 방문했다. 왠지 그 여자친구에게 좋은 아줌마로 보이고 싶었달까.
아이는 월요일부터 행복이와 아침 등교를 함께 하기로 했다고 한다.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서도 학교 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아이가 아침에 적극적으로 학교에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내 마음은 또다시 설레기 시작해서 매일매일 앞으로도 쭉 행복이와 함께 등교하라고 부추겼다.
가끔 동네에서 행복이 엄마를 마주치곤 하는데, 원래는 어색하고 부끄럽게 인사하는 사이였는데 요즘은 그 엄마가 나에게 활짝 웃어준다. 아무래도 그 엄마도 나처럼 아이들의 썸을 의심하며 설레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거 아닐까? 그렇게 우린 서로에게 내적 친밀감을 가지며 반갑게 인사하는 나날을 보냈다.
며칠 지나더니 아이는 함께하는 등교를 그만두겠다고 한다. 시간을 서로 맞추고 기다리고 하는 게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냥 잘 했다고 해 주었다. 아이는 오늘도 목욕 후에 벌거벗고 뛰어다닌다. 감기 걸릴까 봐 제발 바로 옷 좀 입으라고 해도 옷 입는 것보다 놀고 싶은 게 너무 많다고 한다.
잠옷을 대충 걸친 아이는 방에 들어가서 종이를 펴더니 공룡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래, 아직은 여자보다는 공룡을 좋아하는 나이다.
아이의 순수한 우정을 썸으로 치부해서 미안하긴 하지만, 그런 우정의 마음이 썸이지 뭐. 나 역시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유난히 남자를 좋아해서, 내가 원하는 남자아이와 짝을 꼭 해야 했던 것이 남자아이에 대한 첫 기억이다. 그 이후로 성인이 되어서도 쭉 끊임없이 다른 남자들을 좋아해 봤지만 그 좋아하는 마음은 딱 그게 전부였다. 짝하고 싶은 마음. 문자로 장난하고 싶은 마음 정도?
아이의 주제 일기를 읽어보았다. 서로에 대해 쓰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쓰는 것이라는 순수한 고백부터 시작한다. 일기 마무리에 선생님의 한 줄은 "짝과 친하게 지내서 보기 좋군요. 하지만, 수업 시간에 집중해야겠죠?"라고 쓰여있는 걸 보니 둘이 짝인가 보다. 그리고 역시나 아이는 어김없이 수업 시간까지 장난이 심한가 보다.
앞으로 무수한 짝들과 무수한 감정을 나눌 아들을 통해 나 역시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살듯 하다. 동화책 <깊은 밤 필통 안에서> 속 연필들이 무지개 연필의 두근거림을 느껴보려고 서로 꼭 붙어 기댄 연필들이 필통 안에서 함께 가슴을 두근댔던 것처럼 나 역시 회식과 행사로 매일 보지 못하는 아들이지만 함께 있는 짧은 시간들은 꼭 붙어 기대어 아이의 두근거림을 함께 느끼며 지내고 싶다.
아이가 언제까지 허락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일이 있은 지 이미 몇 달이 지났고, 아이는 점점 나에게 들러붙어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내 핸도폰의 문자와 카톡을 다 보더니, 죄다 업무 내용이라 재미없다면서 다시는 바꿔보지 않겠다고 했다.
그 사이 아이가 신나서 만나러 나간 여자 사람 친구도 몇 번이 바뀌었고, 혹시 썸일까 싶은 나의 의심과 설렘은 어김없이 무너졌다. 어쩌면 그때마다 아직은 이 엄마의 마음조차 준비되지 않았다며 안도했을지도 모른다.
이상, 썸이 너무 빨리 끝나고 심하게 연애만 해서 재미 없었던 드라마 <킹더랜드>보다 더 심쿵했던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