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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g Jun 06. 2021

자기가 잘 하는 일에 시간을 쏟아야 한다.

집안일에만 유난히 손이 느린 여자의 변명

 집안일 중에 어떤 일이 제일 싫은지 꼽는다면? 모든 집안일이 서로 공동 1위를 하겠다고 다투다 설거지가 아슬아슬하게 이긴다. 시민문화센터 직장인반 요리 수업을 딱 한 번 참여하고 가지 않은 이유도 수업 후 설거지 때문이었다. 설거지하는 것이 너무 싫다고 누군가와 얘기할 때마다 아이는 옆에서 말한다. “엄마, 설거지는 아빠가 하잖아.”


 그렇다. 남편이 더 많이 하지 않았다면 식기세척기를 그 어떤 것보다 먼저 구입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집안일이 많은 정성과 체력을 요하기 때문에 힘이 든다. 그중 싱크대 앞에 가만히 서서 설거지를 하는 일은 특히 곤욕스럽다. 뭐든지 대충 하고 싶은데 설거지는 대충 할 수가 없다. 빨래에 엉겨 붙어 있을 세탁세제, 걸레질을 미룬 집안 구석구석 미세먼지들과 항상 함께 살고 있지만 유독 그릇에 남은 세제를 상상하면 찝찝하다. 깨끗이 헹구어야겠다는 생각에 계속 서 있으면, 거품이 점점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늘어나는 기분이 든다. 그러다 나중에는 이게 세제 거품인지, 물거품인지 헷갈린다. 그러다 우울한 일이라도 떠오르면 정신이 아득해지며 설거지는 끝나지 않는다. 드디어 끝나면 폭삭 젖어 버린 티셔츠를 갈아입는다. 한참 멍하니 거품을 헹구는 일은 비바람을 우산으로 막아 내며 걷는 것만큼 원시적이다.


 실제로 남편이 설거지를 한 후에 거품이 남아 있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우리 집만 그런 것인지 지인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들은 남편에게 설거지를 시키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설거지나 뒷정리를 깨끗이 하지 않아 꼭 본인이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린다고 한다. 어떤 집은 깨끗이 하라고 잔소리를 했더니 남편이 다시는 설거지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난 남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집안일을 다 할 자신은 없기 때문이다. 그냥 물 마시기 전에 컵을 한 번 더 헹구고, 아이 밥을 뜨기 전에 밥공기를 한 번 더 헹군다. 제일 거품을 자주 남겨 놓는 프라이팬과 양푼은 무조건 다시 세척을 한다. 사용하기 전 한 번 더 헹굴지언정 남편의 설거지를 타박하지 않는다. 배달을 시키고 반찬을 사다 먹는 날도 설거지는 많다. 설거지를 바로바로 안 하고 쌓아 놓는 날은 설거지가 새끼를 치나 보다. 이상하게 양이 늘어나 있다.


 어느 날 부모님께서 인덕션을 사주시겠다고 하셨다. 인덕션 대신 식기세척기를 사달라고 말씀드렸더니 인덕션이나 스타일러가 건강에 더 중요하다는 말씀을 반복하셨다. 설거지하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말씀드리다 급기야는 내 귀한 시간이 싱크대 앞에서 버려지고 있다고까지 말해버리고 말았다. 그 동안 열심히 싱크대 앞에 서서 일하며 먹이고 키워놨더니 그따위로 말한다고 언짢아하셨다. 결국 인덕션과 식기세척기를 모두 사주셨다. 가전 여러 대를 부담 없이 사주실 정도의 경제력을 가지고 계신 것은 아니다. 무이자 할부로 사주시면서 엄마께서도 큰맘 먹고 식기세척기를 구입하셨다. 앞으로 할부 갚으실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운 나에게 엄마는 도리어 고맙다고 하셨다. 나 아니면 하루 종일 설거지하는 것이 당연한 본인 일이라고 평생 생각했을 거라고. 매일 손목이 아프고 약을 먹으면서도 설거지를 기계가 해도 된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해보셨다고 한다. 사드린 것도 아닌데 아직도 엄마는 날 볼 때마다 사길 잘했다며 내 덕이라고 말씀하신다.


 엄마가 설거지하고 정리한 주방은 반짝반짝 빛나고 여느 카페 못지않다. 내공과 연륜으로 깨끗하게 마무리된 싱크대와 주방을 매일 보는 엄마에게 설거지라는 자신의 일이 얼마나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이었을지 알 것도 같다. 사실 나는 얼굴에 비바람을 느끼고 다리에 흙탕물을 튀기며 우산 들고 산책하는 그 원시적인 행위를 좋아한다. 그러다 비가 그치면 비에 씻긴 세상은 유난히 깨끗해서 내가 샤워한 것처럼 상쾌하지 않은가. 가끔 식기세척기의 성능을 의심하며 세제가 잘 씻겨 졌나 그릇에 얼룩을 확인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나보다는 훨씬 잘 하니 맡기는 것이 옳다. 각자 자기가 잘 하는 일에 시간을 쏟아야 한다. 과연 난 뭘 잘할까?    


p.s. 부모님께 뭘 받을 때마다 마음이 너무 무겁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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