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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 Dec 11. 2020

41. 처음 그림을 팔아보다.

수없이 그림을 많이 그렸지만 진심으로 내가 잘 그린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나에겐 어머니와 자주 가던 미술관에서 보던 모네나 르누아르의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색채감의 발끝도 따라갈 수 없었다.

물론 그건 거장의 그림이니 그렇다 해도, 당시 내가 자주 보던 순정만화와 비슷한 얇고 섬세한 선화도 따라 그리지 못했다.

아무리 엉덩이가 무를 정도로 앉아 그림을 그려도 내 그림은 언제나 투박할 뿐이었다.


가시 돋친 듯 두껍고 거친 선. 투박하게 뭉개진 명암, 산만하고 조악한 배경.

어느 하나 잘 그렸다고 할만한 것이 없는 그림들이었다.

그냥 오래 그렸다는 이유로 형태를 잘 잡는 것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미술 전공은 생각해본 적도 없고, 당연히 내 그림을 판다는 것은 더더욱 생각하지도 못했다.


물론 이런 내 생각과는 별개로 학교에서 난 꽤 그림을 잘 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쉬는 시간만 되면 책을 읽던지, 그림을 그리던지 둘 중 하나만 질리지 않고 해대던 괴짜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교과서에는 필기된 곳을 빼면 모든 책 귀퉁이에 그림을 그려댔고, 핸드폰도 그림을 많이 그려 터치 기능이 망가질 만큼 그렸다.

대학 진학만이 목표인 시에서 한 손가락에 꼽는 명문고였기 때문에, 나만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없었고, 그림을 그리려는 사람도 없었다.

미술 입시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자기 그림만 그리는 애가 있다는 이야기는 전 학년은 아니더라도 주변 반에서는 주목을 받을만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 그림에 직접 관심을 가지는 이는 많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툭 튀는 아이는 따돌림을 당할 수밖에 없다.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찢어가는 아이는 있었어도, 내 그림에 진지하게 관심을 보이는 아이는 몇 되지 않았다.

당연히 누구도 내 그림을 진지하게 봐주지 않았으니 그림은 내 공책에서만 살아숨쉬었지, 누군가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그림이 되지 못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끝날 때까지 그랬다.


그리고 수능이 끝나고 졸업만을 기다리는 1월 어느 날이었다.

방학도 얼마 남지 않았고, 정시 원서를 집어넣고 할 일도 없었기에  수업시간에도 빈 공책에 이런저런 그림을 그렸다.

선생님들도 전혀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시기였기 때문에, 다른 때보다 더 정열적으로 그림을 그렸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나만큼이나 괴짜로 유명한 아이가 조심스럽게 나에게 다가왔다.

언제나 시인이 되겠다, 소설가가 되겠다고 하며 문학의 꿈을 꾸는 아이였다.

그 아이는 입시와는 거리가 멀게, 그저 자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1년을 오롯이 쓴 아이라 나만큼이나 괴짜로 유명했다.


그 아이는 내게 말했다.

“내 소설의 표지를 그려줘.”

누구도 올곧게 봐주지 않던 내 그림을 그 아이가 원했다.

나는 사막 한가운데 추락한 비행사처럼, 그 아이에게 물었다.


“어떤 표지를 가지고 싶은데?”

“밤하늘과 사람, 그리고 나무”

어린 왕자와는 거리가 먼 아이였지만 그때는 참 양을 그리던 조종사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콘티 하나 없이 밤하늘과 사람, 그리고 나무를 그려아만했다.

그 아이는 그냥 내가 그 답을 알 것이라는 투로 내게 모든 작업을 일임했다.


의뢰비는 5만원이었다. 내가 그렇게 불렀었다. 그 당시 하루 일당보다 조금 더 높게 불렀다.

설마 내 걸 진짜 살까 하는 의심도 있었고, 이왕이면 내 가치를 한 번이라도 높게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그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한 번의 협상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그려줘.”

어설프게 웃으며 기대된다는 얼굴로 보채지 않는 듯 보채는 그 아이를 보면, 작업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고 늘 그랬던 것처럼 도망칠 수도 없었다. 내 그림을 그대로 봐준 아이였으니까.


“이건 내가 원하던 사람이 아니야. 조금 더 순수해야 해.”

“이것 보다는 조금 더 복잡한 기분이 드는 표정이었으면 좋겠어.”

“저 멀리 별을 바라보는 듯했으면 좋겠어.”


그 아이는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콘티가 없었으니 있는 그대로 여러 번 그려야 했고, 그때마다 여러 감성적인 이유로 난 그림을 다시 그려야 했다.

어린 왕자의 조종사처럼 화가 났던 것은 아니지만, 조금은 귀찮아지기도 했고 어떻게 그려야 할지도 몰랐기에 몇 번의 시안 이후 나는 그림에서 사람을 지웠다.

밤하늘과 나무의 그림자, 그리고 하얗고 텅 빈 사람의 실루엣. 지극히 단순하고 모든 것을 배제한 ‘양이 들어있을 상자’ 같은 그림이었다.


그리고 참 놀랍게도 그 아이는 그걸로 정말 해맑게 좋아했다.

“너한테 그림을 맡기길 잘했어”

라며 그 아이는 내게 그림을 받아갔고, 이내 내 그림은 그의 웹소설의 표지로 이용되었다.

내 손에는 5만원이 쥐어졌다.


그때 난 내 그림을 처음 팔았다.

처음 느끼는 경험이었다. 누군가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도, 그걸 받고 행복해하는 사람을 보는 것도.

그리고 정말 그가 좋아할까?라고 생각하며 고민하며 그리는 시간도 모두 처음이었다.


행복했다. 누군가에게 기대받았을 때의 무서움이 아닌, 완성된 내 결과물로 인해 행복해하는 이를 만난 만족감.

더 좋은 그림을 그려주고 싶었다는 살짝의 후회와 다시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

나는 그림을 팔았다. 그리고 수많은 첫 감각들을 받았다.


처음으로 내가 내 능력으로 인정받아 돈을 쥔 그 순간, 나는 뭐라도 조금 더 완성해서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는 저 아이가 정말 대문호가 되었을 때 그에 걸맞은 그림을 그려줄 수 있고 싶었다.

다시 한번 그림을 팔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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