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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 Dec 10. 2020

40. 내 이야기를 뺏기기 전에


좋아하는 것이 참 많은 만큼, 매일 새로운 공상을 하는 만큼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메모하는 습관이 영 안 들지만, 그럼에도 핸드폰에 들고 있는 아이디어 수첩에는 이런저런 공상 속에서 잡아낸 이야기가 잠자고 있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 중 몇 가지는 다시 보지 않고 폐기되어버렸다. 아이디어가 별로라서가 아니다. 쓸 수가 없어서 폐기되었다.

분명히 매력적인 아이디어였지만 도저히 사용할 수 없어서 기억 저 편에 묻어버렸다.


다른 사람이 먼저 만들어버렸다.

아이디어를 폐기해야만 하는 아주 당연한 이유다.

내가 머뭇거리고 만들어도 될까 말까 하며 자신 없이 미뤄대는 사이 추진력이 있는 누군가는 그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어낸다.

그렇게 내 아이디어는 몇 마디의 텍스트 뭉치로 전락하고, 다시 빛 볼일 없이 어두운 곳에 버려진다.


막 어른이 되던 시기,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점점 광석이 되어버리는 병을 가지게 되어버리고, 사실상의 문명이 멸망한 후 몇몇의 특정 광석종의 사람들만 살아남는 이야기.

나름 이런 이야기는 많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세계관을 만들고, 여러 사람들에게 피드백을 받으며 이야기의 뼈대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만들어가면 만들어갈수록 이것보다 더 완벽해야 할 것 같다는 강박적인 생각이 들어버렸다.

설정이 과학적으로 맞는지,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이대로 괜찮은지, 큰 이야기를 손봐도 모자를 시간에 사소한 하나하나부터 생각나는 대로 다 다듬어댔다.

모든 캐릭터의 일러스트를 내가 다 그려서 캐릭터를 수정할 정도로 애착을 가지고 손보고 또 손봤다.

아직 이야기는 시작하지도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그 해, 나는 재수를 하게 되었고, 공부를 할 시간만으로도 부족한 게 당연한 나날을 보냈다.

잠시 미뤄두고 대학 가서 만들면 되지.’

대학 가면 여자 친구 생겨, 같은 느낌으로 다음을 기약하며 잠시 이야기를 만들던 것을 미루게 되었다.

물론 당연한 수순이지만 대학을 가도 영 안 생기는 사람은 안 생기기 마련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을 가면 공강 같은 시간을 이용해서 카페에 앉아 스토리를 짜내려 갈 수 있겠지라고 혼자만의 캠퍼스 라이프를 그렸지만 어림도 없었다.

과제는 많고, 수업도 많았다. 물론 돈도 벌어야 했다.

다음에, 다음에. 또 다음으로 밀리다 보니 그렇게 내 머릿속에만 이야기가 갇힌 채 몇 년이 흘렀다.


매일 등하교, 출퇴근을 하며 영화,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한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보석의 나라’. 풀 3D 애니메이션으로 이렇게 아름답고 독특한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을까 싶은 작품이었다.

동시에 나는 그 작품을 보면서 너무 늦어버렸다는 탄식을 하고 말았다.

보석의 나라는 인류가 모두 절멸하고 어느 순간부터 각종 광물들이 자아를 가진 채 본인들의 사회를 살아가는 이야기다.

내가 생각하던 이야기와 흐름이 너무 비슷했다. 머릿속이 어딘가 이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누군가 먼저 만들어 버린 것이다. 내 이야기를 나보다 먼저.


내 이야기라고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반짝거리면서 아름답고 동시에 깨지기 쉬운 매력적인 광석 캐릭터들을 볼 때마다 마음 한편이 착잡했다.

문명이 절멸하고 남은 별무리와 같은 허무하면서도 어딘가 미소를 띤 이야기는 ‘오늘은 여기까지’를 말하며 모니터를 끌 수가 없었다.

너무 잘 만들어진 내 이야기였다. 나는 아직도 시작하지 못한 내 이야기. 난 그 이야기에 감동하고 말았다.


슬퍼하고 착잡해하고 더 이상 쓸 수 없는 이야기에 조의를 표해봤자 어쩌겠는가.

이미 내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되어 세상에 나왔고 아름답게 애니메이션으로까지 구현화되어있었다.

결국 몇 년간 쓴 아이디어 노트와 몇 편의 이야기는 휴지통에 들어가 다시 나오지 못했다.

내 몇 년간의 애정을 담은 이야기는 내가 완성시키지 못해 한낮 텍스트 뭉치가 되어버렸다.


어쩌겠는가, 모든 이야기, 모든 아이디어는 만들고 손도장을 찍는 사람이 임자인 것이다.

자기가 머릿속에 몇 년 전부터 담아두고 있었다고 해도 그걸 알아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무언가 내 머릿속에서 통째로 빠져나간 느낌이 아무리 더러워도 어쩌겠는가. 내 이야기는 시작도 못하고 다른 이의 훌륭한 이야기가 되었다.

그 순간 그 기분이 너무 싫었다. 내 이야기가 좀비가 된 듯한 기분은 괜찮으래야 괜찮을 수 없었다.


‘어떻게 되던 만들어보자, 뺏기기 전에’

그 순간 이후로 내 마음에 이전까지 안 들던 생각이 새겨졌다.

좋은 때는 오지 않는다. 어정쩡하게 완벽만 노리다가는 내 전부를 빼앗기고 만다.

그건 너무너무 싫다. 만들어야만 했다. 누구에게 내 이야기를 뺏기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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