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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 Dec 09. 2020

39. 참는 건  잘해.

어정쩡한 것, 못한 것을 찾자고 하면 끝이 없다.

남들은 몇 개나 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 몸을 잘게 나눠서도 단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반대로 해보자, 작은 특별함 세 개는 찾아내지 않았나.

어정쩡한 상태로 영원히 있고 싶은 건 아니니까.


그렇게 해서 찾아낸 장점 하나, 다른 누구보다 버티는 것은 잘한다.

여러 피곤한 상황을 버티고 버티다 보니 길러진 성격인데, 외부에서 오는 압박에 참 강하다.

도저히 어떤 자극에도 짜증이 잘 나지 않는다. 짜증이 나도 순식간에 마음 사이로 사그라든다.

마치 불이 지펴진 숯덩이가 찬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듯 그냥 사그라든다.


다치고 아픈 것에 잘 버틴다. 맛이 없는 것, 시끄러운 것을 그냥 참아 넘기는 것이 다른 사람 이상이다.

그렇다고 외부의 자극에 무감각한 것은 아니다. 실은 다 느끼고 있다. 다른 사람보다 잘 느끼고 있다.

감각이 예민해 예술을 느끼는데 다른 이보다 많은 행복을 느끼지만, 반대로 아프고 고통스러운 건 엄살스럽다 싶을 정도로 잘 느낀다.

여자친구가 어깨를 주무르는 것도 잠시 참고 있기 힘들 정도로 자극 자체에 예민하다.


'그렇게 감각이 예민한데 어떻게 그렇게 자극적인 걸 먹어?'

귀로는 악기들을 분리해 듣고, 입으로는 식재료의 맛을 느낄 수 있는 한 많이 느낀다.

그런데 막귀, 막입으로 보일만큼 무던하게 수준 이하의 자극도 즐기곤 한다.

비계덩어리에 캡사이신만 버무려진 듯한 어느 막창집의 막창도,

음이탈이 나고 음정이 불안한 왠지 오늘따라 컨디션이 안 좋은 가수의 공연도 별 말없이 즐길 수 있다.

즐긴다기보단 그냥 삼키듯 넘겨버릴 수 있다.


'그럴 수도 있지.'

상사가 본인도 이해 못한 채 비합리적인 업무를 던지고 발등에 불 떨어진 듯 보채도 그럴 수 있다.

매주 행군을 하고 물러져 찢어질 것 같은 발을 끌고 잔업을 하기 위해 막사에서 컴퓨터를 켰어도 그럴 수 있다.

어떨 때는 가족 중 한 명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히스테리를 내도 그럴 수 있다.

몸이 힘든 것도, 귀가 아픈 것도, 속이 뒤집히게 짜증 나는 것도 그럴 수 있다.

짜증이 날 만한 상황이고 누구에게 하소연을 할만한 상황이지만 왜인지 그럴 기운조차 들지 않는다.

그냥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하며 넘기면 된다.

괜찮다. 괜찮다. 그러다 보면 괜찮아진다.


괜찮다고 나를 속이며 마음속 어딘가 낭떠러지로 계속 던지면 스트레스가 그냥 사그라드는 것 같다.

그냥 괜찮아진 것 같다.

하지만 정말 괜찮은 걸까? 사회에선 꽤 좋은 사람이 되겠지.

상사로 여러 사람을 모셨지만, 부딪히는 사람 하나 없었다. 내가 참으면 그만이고, 내가 얼마나 힘든지 그 사람들이 알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며 참았다.

아무리 짜증 나는 일을 시켜도 짜증도 반항도 없이 그저 주어진 일을 하는 사람만큼 상사에게 예쁜 사람이 없을 거다.

참 좋은 장점이다. 잘 참는다는 거.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걸까?

가끔 정말로 내 자신이 무뎌진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감각이 무뎌지는 게 아니라, ‘그거 내가 좋아하던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럴 수 있으니까.’라고 중얼거리며 그냥 해오던 날이 켜켜이 쌓이다 보니 내가 그 일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분간하는 게 어려워지곤 한다.

점점 좋아하는 건 없어지고 생활의 기준만 높아진다. 일도 즐기면서 할 수 없고, 음식도, 음악도 좋다는 거, 비싼 것을 먹으면서도 행복해하는 일이 줄어든다.

불타는 듯한 감정이 없다는 것은, 동시에 열정도 사그라든다는 것을 모른 채 계속 참아만 왔다.

속이 타들어가기 싫어 꾹 참았는데. 그러면 행복해질 줄 알았고, 더 ‘어른스럽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남는 건 웃는 것을 연습해야 하는 거울 속 나뿐이다.

여러 번 목 뒤로 넘긴 말을 뱉지 못해 컥컥 대는 나뿐이다.


나는 참는 것을 잘한다.

굉장히 사회에서 쓸만한 장점이다.

참고 인내하면 복이 온다고 했다.

아마 나는 복이 많으려나 보다.

내가 좋아할 것을 모를 만큼 참았으니까.

분명 그럴 거다. 좋은 장점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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