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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 Dec 08. 2020

38. 자기혐오의 늪에서

자기혐오는 어떻게 생기는 걸까?

어떻게 자신을 싫어할 수 있는 걸까?

동물로서의 생존 욕구를 뛰어넘는 자기 파괴 욕구는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
특히 자신이 무언가 일구어내고 싶은 사람이 어째서 자신을 철저하게 싫어하는 걸까?


내 자기혐오는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내 속을 썩여 갉아먹고 있다. 지금도.

언제부터 이렇게 나를 싫어하게 되었을까.

한 가지 이유가 이 혐오감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초등학교 시절 급격하게 찐 살 때문이 클 것이다.

스물일곱 해 중 거의 15년 이상을 다른 이들보다 꽤 살잡이 있는 사람으로 지냈다.

외형이 전부는 아니고, 살이 쪘어도 멋지고 당당하게, 매력 있는 사람으로 지내는 이들은 많다.

하지만 어린 시절,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다름을 정하고, 다름이 곧 외부인으로 판단하는 순수한 악의는 곧 뚱뚱한 아이들을 향했다.


다른 이들 앞에선 무엇보다 착한 이들이 나에게 다른 곳에서 보이지 않는 악의를 보인다.

차라리 처음부터 어느 곳에서든 나쁜 인간으로 평가받는 사람들의 악의를 받았다면 차라리 나았을 거다.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니까. 내 잘못 보다는 모두 사람으로서 완성되지 않은 저 아이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태어나서 몇 해 지나지 않아 배우게 된 건, 나에게 악의를 보이는 사람들이 다른 곳에선 무엇보다 선한 가면을 쓴다는 것이었다.

위선과 배척, 악의가 선한 가면 뒤에서 계속되면서 알게 되는 건, 내 억울함은 어디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네가 살을 빼면 될 일 아니냐.’

‘살찐다고 다 너처럼 숫기 없게 지내는 줄 아냐.’


악의를 당한 건 나지만, 그 악의를 당하게 자초한 것도 나였다.

아니다. 네가 잘못한 것이 아니다고 좋은 말씀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은 열에 한 명을 찾으면 다행이었다.

보통은 그 원인은 다 나에게 있었다. 내가 이겨내지 못한 게 문제다.

살이 찐 네가 문제다.

성격이 내향적인 네가 문제다.

몸이 굼뜬 네가 문제다.

내가 해결하지 못해 받는 ‘당연한’ 수모다.

같이 아파해주기 너무 바쁜 어른들은 당연한 세상의 이치라며 나의 잘못을 끄집어냈다.

아픈 건 나고, 피해를 받은 것도 나인데 내가 잘못한 사람이 되었다.


이 위에 도전하지 못하고 도망친 부끄러운 경험들이 켜켜이 새겨지고 나면 나는 속상할 때 한 가지 생각밖에 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이번엔 또 내가 뭘 잘못했지?’

돈이 없는 내가 잘못한 거고, 말을 제 때 하지 못한 내가 잘못한 거고, 상대방이 불쾌하게 한 내가 잘못한 것이었다.

무엇을 해도 다 내가 잘못한 것뿐이라는 생각뿐만이 내 머릿속을 진창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계속된 자기 비하는 곧 자기혐오로 빠져드는 미끄럼틀이 된다.


사시사철 잘못하는 나만큼 쓸모없는 인간은 없으며,

오늘도 실패하고 마는 근성 없는 내가 죽도록 싫으며,

이도 저도 아닌 재능을 개화시키지도 못하는 내가 뼈에 사무칠 정도로 싫다.

결국 모든 것이 사회가 아닌 내가 잘못한 것이니까. 나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렇게 나는 자기 비하의 미끄럼틀을 타고 자기혐오의 늪에 빠져들었다.

물론 자기혐오는 나를 갉아먹는 가장 훌륭한 방법임을 안다. 하지만 이 늪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 칠수록 작은 실수가 다시 늪으로 빠져들게 하는 이끼풀이된다.

내 목숨을 샤프심과 저울에 올려놓고도 내 목숨이 가벼워질 수 있을 만큼 자신을 싫어하게 되고 만 나는, 나를 마주치는 사람의 작은 찡그림으로도 다시 자기혐오로 빠져들고 만다.

벗어나기 위해 손을 뻗어 잡는 족족 나는 다시 진창에 빠져들고 만다.

이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누군가의 강력한 도움이 없이는 도저히 이 늪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만 같다..


늪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나를 위해, 내 삶을 위해, 내 목적을 위해, 내 소중한 이들을 위해서 자기혐오의 늪을 빠져나가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누구나 내게 손을 내밀어 준다고 해도, 강력한 힘으로 나를 혐오감과 비하 속에서 끌어올려준다 해도 그 사람이 작은 불편함을 보이는 순간,

나는 다시금 미끄러지고 늪속으로 추락하고 말 것이다. 그때는 더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지도 모른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사라지는 게 나아 라고 되뇌며.


자기혐오에 점점  빠져드는 것보다 구해질 것이라는 희망과, 나를 구해주려는 그 사람의 노력이 허사가 될까 무섭다.

새삼 자기혐오라는 늪이 내 생각보다 훨씬 깊고 넓다는 것을 느끼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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