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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 Dec 18. 2020

48. 장인을 동경하다.

어렸을 때부터 장인이 좋았다.

묵묵히 자기가 하는 일은 누구와 비교를 할 수 없게, 독특하면서도 완벽하게 만드는 그들이 멋있었다.

오롯이 세상에 자신과 작품만이 있는 듯한 진지한 표정. 꿰뚫는 것만 같은 눈빛, 굳게 다문 입술.

어떻게 보아도 동경할 수밖에 없는 멋있는 인간상이라고 생각했다.


만화를 볼 때도 뭐든 잘하는 완벽한 캐릭터보다는 한 가지 기술만 도 닦듯이 갈고닦는 캐릭터가 정감 갔다.

보통은 주역 캐릭터가 아니기 마련이라 주역의 화려함을 위해 희생하는 역할인 것을 알면서도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스포츠를 볼 때도 다른 건 몰라도 수비 하나는 일품인 선수들이 좋았다.

그들이 영원히 일류의 스타가 될 수는 없어도 승리를 뒤흔들 정교한 플레이를 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떨렸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한 가지만큼은 양보할 수 없는 그런 사람. 무엇이 있어도 타협하지 않고 한 가지만큼은 누구보다 잘할 수 있는 사람.

단순히 잘하는 것이 아닌, 그 기술에 자신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 묻어 나오는 그런 사람.

자기 자신을 부끄러움 없이 ‘장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망치를 손에 쥐어도 괜찮고, 붓을 손에 쥐어도 괜찮다. 방식은 어떤 것이어도 좋았다.

조각을 해도 좋았고, 자수를 떠도 좋았고, 글만 써도 괜찮았다. 엉덩이에 진물이 날 정도로 한 곳에서 집중하는 것이 행복했다.

언젠가는 나도 누군가에게 내 세계가 오롯이 담긴 작품을 보여주며 기술을 전수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 단계만 더하면 더 높은 단계, 장인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때, 자꾸 성장의 문턱에서 좌절하고 만다.

관심의 폭은 넓고 욕심은 많아 좌절하고 나면 다시 그 문턱에 가야 하는데 다른 일을 찾아 몸을 돌리고 만다.

시간이 없다. 돈이 없다. 지금 해야 할 더 바쁜 일이 있다. 이 일은 나랑은 좀 안 맞는 것 같다. 변명은 늘어난다.


어느새 내 꼴을 보니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다. 가진 기술은 많다. 수없이 많다.

아주 팔방미인이라 불릴 수 있을 정도로 이것저것을 다한다. 그리고 다 잘하지는 못한다. 그냥 당장 없는 것보단 나으니 손을 빌리는 것이다. 나도 안다.

‘이 사람 이건 아주 전공분야야.’라고 믿고 맡길만한 것이 하나 없다. 역시 시키면 보통은 하니 그냥 떠맡는 과제가 있을 뿐이다.

난 분명 한 가지라도 아름답게 꾸며낼 수 있는 장인이 되고 싶었는데, 현실은 장인이 만들어놓은 기술을 하나 둘 떼다 파는 약장수일 뿐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말로는 잘하지만 치명적인 결함이 없기만을 바라는 그런 사람.


회사 내 앞자리에는 언제나 프로그래머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첨예하게 세우며 서로 머리를 맞댄다.

그들만이 아는 그들만의 프로그래밍 전쟁이다. 그렇게 싸워대다가 잠잠해지고는 나를 불러들인다.

‘아인 씨, 이거 봐요. 이걸 드디어 구현해냈어요.’

그들의 자부심 넘치는 얼굴 뒤로 유려한 디자인으로 추가 기능이 완성되어 있었다. 프로그래머들이 요 며칠 밤을 지새우며 만든 기능이다.

그 사람들의 얼굴에서 내가 예전부터 동경하던 장인의 얼굴이 보였다.


얼굴이 붉어져 맞장구를 진심으로 쳐줄 수 없었다.

부끄러웠다. 사회생활에 바쁘다. 돈이 급하다. 당장은 급한 대로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

그렇게 둘러대며 살았는데, 내 앞자리에도 내가 존경하던 장인의 마음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나는 여전히 약장수처럼 이런저런 흉내나 내며 일을 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은 벌써 얼굴에 사랑하는 일을 향한 자부심이 서려있구나.

부럽다. 나도 내가 자랑할만한 나만의 작품을 만들고 싶은데.


나도 저 사람들처럼 좌절하고 전쟁같은 싸움을 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담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자부심을 가지고 보여줄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들 수 있을까.

장인이 될 수 있을까.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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