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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 Dec 16. 2020

46. 도태되는 것만 같다.

언제나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과는 영 맞지 않는 일을 했다.

심리학을 하고 싶던 아이는 일본어를 하게 되었고,

일본어를 하고 싶던 청년은 전선을 만지며 군생활을 하게 되었다.

전선을 만지다 전역했더니 스타트업에서 서비스 운영을 하고 있다.

이러기도 힘들 만큼 뭐 하나 공통점도 없이 계속해서 새로운걸 해왔다.


도전하는 멋진 인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도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언제나 모르는 걸 하면서도 적응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는다.

접하게 되는 모든 일을 좋아하게도 되고 배우는 것도 많으니 후회하지도 않는다.

다음엔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묘한 기대감도 든다.


하지만 도태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느 일을 해도 당연하게도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넘쳐난다.

대학 전공부터 실무까지 몇 년을 같은 업무에만 투자한 사람들이 있는 환경에 던져지는 것이다.

그 사이에서 나는 언제나 경력 1~2년의 새파란 애송이로만 남는다.

무슨 말을 해도 남들이 이해하는 것의 배는 걸리고, 아무리 배워도 같은 템포로 업무 대화를 쫓아갈 수가 없다.

열심히 하고 있고, 남는 시간까지 다 써서 일을 이해하는데 써봐도 경력의 차를 줄일 수 없다.


같이 새 서비스 기획 회의를 들어가면 회의를 듣는 것만으로 허덕인다.

모르는 단어를 메모하다 보면 이미 한가득 나에게 보내는 메신저가 가득 찬다.

내가 지금 맞게 이해를 하고 있는 건지, 사전을 비교하고 물어가다가도 눈치가 보이게 된다.

신입인 시기도 하루 이틀이지, 언젠가는 나도 연차가 쌓일 텐데 발전한 것은 하나도 없다.

아니, 발전은 하겠지. 그 사이에 나와 같이 일하는 팀원들은 나 이상 발전할 테고 말이다.

그 사람들이 놀고 있는 게 아니니까. 당연하다.


오늘도 퇴근하며 업무와 관련된 사이버 강의를 찾아본다. 보면서 문득 재밌을 것 같다고 느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강의를 신청할까. 도태되는 기분을 떨칠 수 있을까? 이내 망설인다.

부대에서 내 일을 너무 좋아해 이런저런 자격을 땄다. 난 그 일을 좋아했고, 오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삶은 내 계획과는 다르고, 내가 시간을 들이며 사랑했던 일은 하지 않을 일이 되어버렸다.

내 경력과 자격증은 없던 것과 다름없어졌고, 나는 다시 1년 차 신입이 되었다.


몇 년 뒤에 나는 다른 일을 할까? 아니면 지금과 비슷한 일을 계속할까?

어떤 일을 하게 돼도, 내가 다른 이들을 제치고 두각을 드러낼 수 있을까?

공부하고, 노력하면 경력과 경험에서 나오는 차이를 좁히는 날이 올까?

아니면 그냥 여전히 다른 이들에 비하면 어정쩡한, 다채로운 경험만 가진 사람으로만 남을까.


무기력함이 순식간에 몰려온다.

사이버 강의 신청 페이지를 닫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어쩌면 이미 스타트가 너무 늦어버린 걸 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든다.

난 이 일이 재밌어지려고 하는데, 이미 정말 재밌는 일은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 만큼 뒤쳐져있다.

나 같은 사람이 뽑힌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어정쩡한 무경력의 신입이 뽑힌 이유는.


명함에 제대로 적을 직함조차 없는, 경험만 많은 신입.

그저 아직은 많이 도태되지 않았기만을 간절히 바란다.

내일도 미지의 세계로 출근을 해야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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