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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 Dec 20. 2020

50. 그냥 행복하니까.

여자친구와의 기념일이었다.

어디를 가도 바이러스인 때라 사람이 최대한 없는 곳으로 숨어들어 오랜만의 기념일을 보냈다.

마스크는 언제나처럼 답답하고, 조금만 걸어도 살을 에는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사람을 피하느라 느지막이 만나 얼마 안 지나 저녁을 먹고 헤어져야 하는 짧은 데이트였다.

특별한 건 기념일이라고 할 것 밖에 없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낸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는 데이트였다.


그래도 5분이라고 더 보겠다고, 조금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 2호선. 요즘 들어 제대로 본 적 있나 싶던 야경을 보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그때, 여자친구가 핸드폰을 꺼내 홈리스를 후원하는 단체의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얼마의 돈을 후원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속삭였다.

‘행복한 날이니까. 후원하는 거야.’


그 말에 나는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냥 행복한 거였고, 그냥 후원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데이트가 불만이 있을 이유도, 후원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그때까지 오늘 나는 좋은 날을 선사해준 것이 맞을지, 고민하고 후회하는 동안 그녀는 그냥 오늘이 행복했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있냐고 묻는 듯한 그 얼굴을 보자 얼굴이 화끈해졌다.


나는 무엇 때문에 오늘의 데이트가 부족할 수 도 있다고 생각한 걸까.

나는 무엇 때문에 내가 뭐 하나 못한다며 괴로워했던 걸까.

그냥 그 시간이 행복한 것뿐인데.


물론 아직 모자란 것도 많다. 실수하는 것도 많다.

분명히 어설프고 특출난 장점이 없는 것도 맞다.

하지만 그것만 생각하며 괴로워할 이유는 없다. 내가 나에게 죄를 지은 건 아닌걸.


한 꺼풀 벗겨보면 행복한 일이 많다.

결국 내가 좋아서 한 일이고,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다.

같이 있고 싶어 같이 있는 사람들이다.

아니, 한 꺼풀 벗길 것도 없다.


그냥 원래 행복한 기억이었다.

내가 그 위에 내 강박과 자책으로 덧칠해 버린 것이다.

그냥 본디 감정에 충실하기만 해도 좋은 시간에도 잔뜩 회색 감정을 담아와 퍼부었다.

그러고 오늘도 뭐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는 하루라고 눈물을 흘리며 잠에 들었다.

내 오늘의 찬란한 행복의 색은 잊어버린 채, 잿빛이야. 잿빛이야 하며.


그녀를 좋아하고, 사랑하면서도 늘 배우는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로, 그녀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느꼈다.

오늘의 행복한 기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어서.

그 행복한 기억을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어서.

내 자학과 강박의 손길을 잡아줄  있는 사람이어서.


그냥, 행복함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이어서 다행이었다.

같이 행복함을 느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열차 위에서 바라보는 겨울밤, 서울 거리는 아름다웠다.


행복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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