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와의 기념일이었다.
어디를 가도 바이러스인 때라 사람이 최대한 없는 곳으로 숨어들어 오랜만의 기념일을 보냈다.
마스크는 언제나처럼 답답하고, 조금만 걸어도 살을 에는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사람을 피하느라 느지막이 만나 얼마 안 지나 저녁을 먹고 헤어져야 하는 짧은 데이트였다.
특별한 건 기념일이라고 할 것 밖에 없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낸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는 데이트였다.
그래도 5분이라고 더 보겠다고, 조금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 2호선. 요즘 들어 제대로 본 적 있나 싶던 야경을 보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그때, 여자친구가 핸드폰을 꺼내 홈리스를 후원하는 단체의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얼마의 돈을 후원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속삭였다.
‘행복한 날이니까. 후원하는 거야.’
그 말에 나는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냥 행복한 거였고, 그냥 후원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데이트가 불만이 있을 이유도, 후원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그때까지 오늘 나는 좋은 날을 선사해준 것이 맞을지, 고민하고 후회하는 동안 그녀는 그냥 오늘이 행복했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있냐고 묻는 듯한 그 얼굴을 보자 얼굴이 화끈해졌다.
나는 무엇 때문에 오늘의 데이트가 부족할 수 도 있다고 생각한 걸까.
나는 무엇 때문에 내가 뭐 하나 못한다며 괴로워했던 걸까.
그냥 그 시간이 행복한 것뿐인데.
물론 아직 모자란 것도 많다. 실수하는 것도 많다.
분명히 어설프고 특출난 장점이 없는 것도 맞다.
하지만 그것만 생각하며 괴로워할 이유는 없다. 내가 나에게 죄를 지은 건 아닌걸.
한 꺼풀 벗겨보면 행복한 일이 많다.
결국 내가 좋아서 한 일이고,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다.
같이 있고 싶어 같이 있는 사람들이다.
아니, 한 꺼풀 벗길 것도 없다.
그냥 원래 행복한 기억이었다.
내가 그 위에 내 강박과 자책으로 덧칠해 버린 것이다.
그냥 본디 감정에 충실하기만 해도 좋은 시간에도 잔뜩 회색 감정을 담아와 퍼부었다.
그러고 오늘도 뭐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는 하루라고 눈물을 흘리며 잠에 들었다.
내 오늘의 찬란한 행복의 색은 잊어버린 채, 잿빛이야. 잿빛이야 하며.
그녀를 좋아하고, 사랑하면서도 늘 배우는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로, 그녀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느꼈다.
오늘의 행복한 기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어서.
그 행복한 기억을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어서.
내 자학과 강박의 손길을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어서.
그냥, 행복함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이어서 다행이었다.
같이 행복함을 느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열차 위에서 바라보는 겨울밤, 서울 거리는 아름다웠다.
행복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