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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 Dec 29. 2020

59. 복수자들.

중학교 시절, 고등학생이 되면 왕따를 당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래도 다 수험공부를 해야 하고 자신들의 미래가 있는데 그렇게까지 심하게 대하겠어?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했다. 아마 잘 어울리지는 못해도 괴롭힘은 당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당연하게 나는 반에서 별종으로 분류되었고, 아주 당연하게 괴롭힘을 당했다.

일어나 보니 핸드폰이 없어져있어 따져 물었더니 폭행을 당했다.

주어진대로 청소를 하다가 걸렛물을 맞는 건 늘 있는 일이었다. 물론 젖은 채 놀라 뒤를 돌아보면 또 폭행은 시작되었다.

그 모든 도를 지나친 따돌림이 모두 수험이라는 이유로 묻혔다.


우리 학교는 나름 그 지역에서 가장 대학 진학결과가 좋은 명문고였고, 괴롭힘을 주동하는 애들은 보통 대학성적이 어느 정도 기대되는 아이들이었다.

물론 그 아이들이 괴롭히는 대상도 성적이 나쁜 애들은 아니었다. 그냥 반에 한 두 명 정도, 자기 주관이 강하고 감성이 대다수와 다른 아이들일 뿐이었다.

이유는 그것 하나였다. 말을 잘못한 것도 없었고, 접점도 없었지만 그저 자신의 수험 스트레스의 풀이 대상으로 누군가를 삼고 싶어 했고, 우리 학교는 그게 문제로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학교가 조금 다른 이들을 놀리기도 하며, 더 밀어붙이기도 했다. 당연히 혼자서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리 없었고, 수험생인 건 다들 마찬가지여서 그저 마음이 닳아가며 버틸 뿐이었다.


반마다 공공연히 있는 따돌림이었던 만큼, 따돌림에 가까운 아이들은 서로를 알았다. 보통은 서로가 서로에게 엮이지 않으려고 했다. 굳이 엮여봤자 좋은 건 없으니까.

그중 우연인지 필연인지 따돌림에 가까웠던 여섯 명이 우연한 기회로 친구와 친구의 친구로 엮여 자주 만나게 되었다.

굳이 처음부터 친해지려 하던 건 것도 아닌데, 너무 많이 지쳐있었던 탓일까, 쉬는 시간이면 복도에서 만나고 점심시간에는 학교 뒤 돌의자에서 만났다.

별로 그럴듯한 주제가 있진 않았다. 아무 말이나 생각 나는 말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별 말없이 갑자기 들고 온 기타에 맞춰 낄낄대는 날도 있었다.

그렇게 반에 있는 시간보다 여섯 명의 소모임이 더 많아졌다. 어디선가 악의가 담긴 비아냥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가 들리는 순간이 참 소중했다.


그렇게 다섯이 만나는 일이 잦아지고 고등학교 3학년이 되니 괴롭힘 자체가 줄어들었다. 반 아이들과 만날 일 자체가 줄어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게 가장 좋은 변화였다. 그 대신 몰려다니는 우리에겐 한 가지 별명이 생겼다.

‘어벤저스’. 고등학교 3년 내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좀 과분한 별명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찌 보면 멸칭아닌 멸칭이었다. 간혹 과한 스트레스로 인해 주체하지 못하는 친구에게 ‘헐크’라는 별명을 붙인 선생이 교내에 유명한 우리를 두고 놀리듯 얘기했다.

‘야, 헐크도 있으면 뭐 너희 다섯은 어벤저스냐?’

조소인지 뭔지 모르는 이런저런 웃음이 반 여기저기서 섞여나왔고, 그 이후로 우리는 학교에서 ‘어벤저스’로 불리는 1년을 보냈다.

특이했던 점은 그렇게 적응할 수 없는 교정에서 서로에 의지하며 지내던 우리가 그 멸칭에 가까운 별명은 재미있게 받아들였다는 점이었다.

유달리 특히 공부머리가 좋은 친구는 ‘아이언맨’, 특히 다른 이들의 이목을 끄는 이는 ‘캡틴 아메리카’. 다른 친구들에 비해 키가 더 큰 나는 ‘토르’. 이런 식으로 서로에게 포지션을 아예 붙여가면서 그 별명을 자학 반, 즐거움 반으로 받아들였다. 놀림으로 시작한 별명은 그렇게 우리가 받아들이면서 지금까지도 우리의 이름이 되었다.


남들이 놀리는 명칭이 어쩌다 보니 그 당시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들던 히어로 집단이었을 뿐이지만, 그 이름이 우리가 그냥 겉도는 사람이 아닌 뭔가 꽤 대단한 삶의 의미를 가진 집단처럼 느껴져서 더 좋았던 것 같다.

우리는 놀림거리가 될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잘못한 것이 있던 것이 아니니까, 부끄러울 것 없이 영웅처럼 가슴을 펴도 괜찮잖아. 다른 이들이 우리를 ‘어벤저스’라고 부를 때마다 그렇게 자신을 다독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복수자들’이라는 이름이 좋았다. 피의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닌, 울분을 원동력으로 영화 속 히어로들처럼 다른 이들의 삶을 바꾸는 긍정적인 ‘복수’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주문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만나고 있다. 나이가 들고 서로 군대를 가는 시기가 달라 근 2-3년은 서로 만나는 일이 적었지만, 여전히 카카오톡방은 하루에도 두세 번 시끌시끌하다.

여전히 우리는 겉돌고 있다. 예전처럼 직접적으로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을 보는 방법이 다른 이들과 달라 섞이려야 섞이지 못한다. 여전히 우리는 어정쩡하게 사회 가운데 서있다.

스트레스 가운데 닳고 닳아 힘들 때마다 우리는 다시 어벤저스로 돌아온다. 서로가 이 이름으로 모일 때만큼은 그 어떤 압박도 스트레스도 없다. 단지 고등학생때처럼 힘든 일을 말하고 서로 생각나는 말을 하며 낄낄댄다.

그 가운데에는 말하지 않는 믿음이 있다. 분명 내 친구들은 더 대단한 이들이라는 믿음, 입 발린 칭찬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바라고 있다.


그야 그럴게, 우리는 어벤저스라는 이름으로 만났으니까. 그렇게 이름을 붙여준 사람들이 누구였든 이제는 우리가 우리를 그렇게 믿고 있다. 사회에서 받은 스트레스 이상으로 멋진 복수를 할 수 있으리라고. 그런 친구들이라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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