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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 Jan 04. 2021

65. 세 시간.

세 시간. 출퇴근에 왕복으로 걸리는 시간이다.

서울에서만 살던 지인들은 내 출근시간을 보곤 혀를 내두르곤 하지만 평생 경기도에서만 산 내게는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다.

물론 적은 시간이라는 것은 아니다. 이틀에 반나절, 한 달이면 이틀을 버스와 지하철 안에서만 보낸다.

정말 긴 시간이다. 이렇게 매일 세 시간씩 통근에 써야 된다는 것이 안 아깝다면 거짓말이다.


이렇게 통근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은 사람이 많은지, 성공한 사람들의 책은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라'라고 말한다.

통근시간에 책을 읽어라, 단어를 몇 개씩이라도  외워라. 그 잠시간의 시간이 내 미래를 바꾼다. 그런 이야기들 있지 않은가.

당연히 통근을 하면 그 시간에 당연히 공부를 해야 할 것만 같고, 그 자투리 시간에 공부를 하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을 향해 달려가는 것만 같게 된다.


나도 버스 안에서 공부하던 때가 있었다. 중학생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의 이야기다.

고등학생 때도 왕복 1시간 이상의 통학시간이 기본이었고, 재수를 거쳐 대학생이 되면서는 통학시간 왕복 3시간에 익숙해졌다.

사람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버스 안에서 다양한 일들을 했다. 목이 금방이라도 꺾여 떨어질 것처럼 잠만 자는 사람, 어떻게든 게임에만 몰두하는 사람. 남들 안 보이게 불건전한 것들을 탐닉하는 사람, 욕하고 버스 안에서 싸우는 사람들은 늘 있었다.

복작거리는 그 사람들의 뭉치 가운데서 나는 마치 쉬면 죽는 사람처럼 매일 책을 읽었다. 어떻게든 책 한 줄이라도 더 읽어야겠다며 아득바득 어지러운 차 안에서 눈을 비볐었다.


나는 시간을 버리면 안 된다는 그 내용을 맹신했다. 매일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났다. 밥을 먹을 때도 책,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귀도 쉬게 하지 않았다. 뉴스, 노래, 강의 어떤 거든 눈과 귀 모두 꽉 채워서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 미래에 대한 바람이 많았으니까, 지금 이렇게 자투리 시간을 아껴서 나를 성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내 능력은 그때나 지금이나 어정쩡했으니까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중에는 환승 구간별, 분 단위로 스케줄을 나눴다. 어느 구간까지는 일본어 공부, 어느 구간까지는 영어 공부, 어느 구간까지는 시사/경제 공부. 뭐 그런 식이었다. 지금이라면 읽지 않을 만한 책들도 어떻게 읽었는지 모르게 다 읽었다.

정말 열심히 자투리 시간을 남기지 않고 공부했다. 내 학생 시절 통학시간은 다른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충실했다.


자투리 시간에 충실했다. 하지만 흔들리는 버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자기 자신을 몰아붙여봤자 생기는 것은 피로뿐이었다.

남들보다 배는 열심히 살려고 노력한 만큼 남들보다 배는 빠르게 피곤해졌다. 피곤해진 몸을 이끌고 가는 곳은 학교였고, 집이었다.

가장 집중해서 공부를 할 수 있고 자신을 마주 볼 수 있는 장소에 나는 언제나 지친 상태로 도착했다. 교수님이 올 때면 졸음을 떨치기 위해 핸드폰을 잡아야 했고, 어지러운 눈 앞을 정돈하기 위해 눈을 잠시 감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샌가 보면 이마가 뻘게질 때까지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자고 있는 건 매일의 일과였다.

수업시간에는 핸드폰, 게임, 지쳐 쓰러져 취침. 집에 들어오면 또다시 지쳐서 핸드폰, 잠시간의 게임, 언제 잤는지도 모르고 취침. 효율은 떨어질 때까지 떨어졌고 매일의 내 학습 결과는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러면 또다시 뒤처질 수 없다. 너무 어제의 공부가 맘에 안 들었다며, 어제 못한 것까지 버스 안에서 만회하려고 했다. 결국 버스 안에서 해야 하는 공부의 양은 복리로 늘어났고, 스케줄은 점점 더 빡빡해졌다. 당연히 어깨는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갔다. 매일 아침 일어나는 게 고역이 되었다.


그렇게 세 시간씩 세 시간씩 아껴서 나는 뭐가 되었는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

집중해야 할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조금은 쉬어도 될 시간에 강박적으로 무언가 하지 못하면 성에 차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냥 피곤하면 죽은 듯이 버스에서 자고, 쉬고 싶으면 잠시 영화도 보고, 아무 할 일 없이 흘러가는 한강물,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들이나 보다가 책상에 앉아서 열심히 한다 해도 손해 볼일은 없었을 텐데, 뭣 때문에 주술에 걸린 햄스터처럼 버스 안에서 공부의 쳇바퀴만 돌려댔는지 모르겠다.


‘버려지는 세 시간을 아끼면 몇 년 후의 내가 바뀐다.’

‘오늘 잠시의 시간이 내일은 다시없을 보석 같은 시간이다.’ 좋은 말은 차고 넘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세 시간의 통근시간을 오롯이 집중해 공부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것은 없겠지.

물론 그것보다 더 귀한 시간인 업무시간, 집에서의 여가시간을 더욱 밀도 있게 쓴 사람에 한정된 이야기다.

그리고 나는 그렇지 않았다. 빠르게 지치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가혹하게 자아비판적인 사람이 매일 자신을 더 지치게 아침저녁으로 채찍질해봤자 좋을 것은 없었다.

나는 그냥 저런 좋은 말 다 뒷전에 던져버리고 쉬기나 하면 좋았을 것 같다.

어차피 출근하면 쉬지 못하고 일을 할 거고, 그 와중에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거다. 그 시간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게 갉아먹는 세 시간은, 그냥 아무것도 아닌 시간 취급하는 게 나았다.


때 늦은 후회다. 그렇게 버스 안에서의 며칠을 버리지 않겠다고 긁어모아서 그 수백 배의 시간을 버린 사람의 후회.

다행인 것은 오늘 밤도 자고 일어나면 내일의 작은 세 시간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일 내게 주어진 시간 중 가장 자유롭고 아무것도 요구되지 않는 세 시간.

처음부터 아무것도 요구되지 않는 시간이라면, 나도 그냥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일의 세 시간은 조금 더 충실하게 쉬어보려고 한다. 일은 내일 낮의 내가 할 거고, 자기 계발은 내일 밤의 내가 할 것이다.

내일 아침과 저녁의 세 시간짜리 나는 조금 쉬어도 괜찮다. 조금 딴짓 해도 괜찮다. 그 때라도 쉬지, 더 나은 사람이 될수록 그런 시간도 없어질 거니까.

세 시간을 조금은 더 충실하게 쉬는데 써보려고 한다.

내일의 출퇴근 세 시간이 조금은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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