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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 Jan 06. 2021

67. 레트로 인간.

나는 레트로 스타일을 좋아한다.
디지털보다는 아날로그가 좋고, 손이 하나라도 더 많이 가면 푸근하게 정감이 간다.
레트로가 좋고, 아날로그가 좋은 이유, 디지털이 로망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지금이라도 다시 책을 만들 만큼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레트로를 사랑한다.  회중시계, CD플레이어, 바이닐 레코드, 모래시계, 올드카, 중절모, 필름 카메라...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몇십 년의 시간을 버티면서 살아남아온 골동품들이 너무 좋다.  

몇 년의 한 번 유행을 반짝 타긴 하지만 레트로는 언제나 소수의 취향이다.

낡아서 언제 망가질지 모르는 골동품, 그런 골동품을 지원하는 아날로그 기기들에 기꺼이 돈을 들을 시람은 많지 않다. 필름 카메라를 입문하려면 가장 저렴한 카메라로 알아보려 해도 20만 원 돈이 나온다. 기기만의 얘기다. 네트워크와는 거리가 먼 아날로그 기기들은 데이터를 보관하기 위해 계속해서 소모품을 사야 하고, 유지보수를 해주는 곳도 없어 본인이 보수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경우도 있다.

굉장히 귀찮은 일이다. 좋아하는 입장에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귀찮은 시간과 비용이 모여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준다.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나만의 시간, 나만의 장소, 나만의 스타일을 만든다.


휴일 아침, 캡슐커피나 간편한 키트를 쓰는 것보다는 모카포트로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는 게 좋다. 차라면 차칙으로 차를 조금 덜어 주전자로 끓인 물을 부으면서 열기를 느끼는 것도 좋다. 말차를 풀어낸다면 더더욱 좋다.
차가 우려지는 동안 LP플레이어를 켜 베토벤의 교향곡 레코드 위에 바늘을 올린다. 잠시간의 정적과 먼지 낀듯한 얼마간의 잡음. 그 뒤로 퍼지는 따뜻한 오케스트라의 연주.

다 따른 커피를 마시며 어젯밤 읽던 책을 뒤적여 책을 읽는다. 왠지 다시 읽고 싶었던 부근부터.


쓸모없이 손이 많이 가는 그 절차들이 너무나 따뜻하고 또 느긋하다. 바로 커피를 마실 수도, 바로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도 없지만 다 처음부터 시작하고 기다려야 하는 느긋함이 삶에 치여 힘도 다 빠졌으면서 달리려고 하는 나를 진정시킨다. 아주 건강하고 차분하게 진정시킨다.


느긋함과 함께 오는 건강한 차분함이 더 좋다. 술을 마셔도 진정이 되고, 잠을 자도 몸은 풀리겠지만 그것과는 궤가 다른 느긋함이다.

계속해서 손을 움직여줘야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동선과 작동을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차분하고 느리지만 모든 것이 내 손을 타야 한다.

생각을 놓고, 나를 놓고 마냥 아무 생각 없이 풀어지는 것이 아닌 늘 애정을 가지고 바라봐야 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차분하고 느리지만 계속 나를 건강하게 깨어있게 한다.


하지만 아날로그와 레트로를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좋아하는 이유야 수십 가지를 대고 한 가지 한 가지 제품마다 다 좋은 이유를 댈 수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자신이  아날로그 제품들과 다르지 않다 날이 갈수록 느끼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수요가 있을 것이다. 분명 볼수록 좋다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만큼 믿을만한 사람도 없다고도 한다. 충분히 매력적이고 따뜻하고 중후한 멋이 있다고 한다.

참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맞다. 난 좋은 사람인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시대에는 조금 어긋나 있는 좋은 사람인 것 같다.

아직도 느긋한 장편소설을 쓰고 싶어 한다. 노래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가 꼭 맞는다. 집은 꼭 지어서 살고 싶고 케팅하면서 제대로 있는 척 거짓말을 꾸며내는 건 참 못한다.

'왜 그래?'라고 할 정도로 잘 팔리는, 인기 있는, 인정받는 사람과는 거리가 있다. 소수의 마니아만이 나를 찾는다.

흘러간 레트로 감성이 맞는 이들만 간혹 나를 찾는다,


그래도 누군가는 꾸준히 나를 알아주니 다행이다 싶다가도 평생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은 되지 못할까 싶어 문득 두렵다.

평생 레트로 취향인 이들만 좋아하다 가끔 유행 타듯 불려지는 사람이 될 것만 같다.


아날로그가 다시 사랑받는 일이 있을까? 아늑하지만 뭔가 투박하고 거칠어 불편한 게 많은 이런 사람을 바라는 때가 올까?

세상은 디지털로 더욱 효율적이고 간단한 곳으로 흘러가지만 그래도 나라는 사람을, 바이닐을, 필름 카메라를 더 많은 사람이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투박한 잡음을 즐기는 이들이 많았으면, 살짝 뿌옇게 찍힌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재미없고 일머리 없지만 계속 꿈꾸는 나를 원하는 세상이 많아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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