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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 Jan 07. 2021

68. 구세주

절체절명의 순간,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순간. 모두가 포기해도 좋다고 말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불현듯 등장해 절망 속에서 모두를 한희의 한 복판으로 올려놓는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 스러지더라도 다른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기억되는 사람.

참 진부하지만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구세주의 전설 이야기다.


구세주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단지 그런 구세주가 우리 주변에서 보기 힘들다는 것을 안다.

9회 말 2 아웃 역전 홈런, 상태 팀의 스파이크를 몸으로 몇 번이고 받아내는 리베로, 버저비터 3점 역전 슛.

누구나 바라는 통쾌하고 극적인 구세주의 등장이 스포츠에선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스포츠에 열광한다.

나라를 대가로 자신의 사욕을 이루려는 지배자의 앞을 막아서는 연금술사. 자신만의 정의를 막기 위해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도 손가락을 튕기는 히어로.

가슴 벅차고 비장한 구세주의 희생을 목도하는 것이 이야기 안에선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 속에 빠져든다.


모두가 구세주를 원한다. 삶은 언제나 어제보다 오늘이 더 팍팍하고 아버지의 세대보다 우리의 세대가 더 희망이 없다.

복권과 공무원, 주식과 비트코인의 시대. 자신의 삶이라도 구원해줄 구세주를 만들기 위해 모두가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발버둥 친다.

특정 정치인과 종교인을 맹신하며 그 이외의 대안을 배척한다. 그들이 자신과 세상의 구세주가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모두가 오늘도 구세주를 바라 마지않는다. 나의 세상을 살기 좋게 만들어줄 구세주를 꿈꾼다.


나도 구세주를 바란다. 내 인생을 바꿔줄 구세주는 그렇게 큰 관심은 없고, 지친 사람들을 잡아줄 구세주를 바란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그 구세주가 나였으면 좋겠다. 그렇다. 나는 구세주를 꿈꾼다.

오만방자하고 말도 안 되는 꿈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어떻게 완벽한 구세주가 될 수 있겠나. 나도 안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세계 전체를 구하는 인간이 되자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내 주변에, 내 힘이 닿는 사람들과 사회는 내가 절망 속에서 끌어내고 싶다.

내가 지쳐서 쓰러지더라도 나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진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나에게 너무 큰 부담을 지우는 소망인 것을 안다. 세상에, 구세주가 되고 싶다니.

필연적으로 힘든 일이다. 회사의 구세주가 되고 싶든, 그저 자기 주변, 지기 친구들의 구세주가 되고 싶든, 아니면 예술계의 희망 같은 존재가 되고 싶든지 그 모든 게 말로는 ‘작은’ 구세주라고 하더라도 말도 안 되게 많은 것을 짊어져야만 한다.

자기에게 이목이 끌려도 자신의 신화를 본인이 치켜세우려 해선 안된다. 모든 함 든 상황에서 힘들다고 말하며 뒤로 빠져서도 안된다.

무엇보다 ‘모든 것을 잘해야만 한다.’ 당연한 일이다. 남들보다 몇 배는 뛰어나야 한다.

구세주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갖추더라도 사람들에게 믿음을 얻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이 사람이 우리를 좋은 곳으로 이끌고 간다’라는 믿음을 주지 못한다면 끝이다.

모든 것을 갖춰야 한다. 단 몇 사람이라도 절망 속에서 끄집어내려 한다면 당연히 갖춰야만 하는 일들이다.


꿈은 나를 성장시키는 만큼 나를 속박한다. 언제나 그래 왔다. 하지만 특히나 누군가의 손을 잡고 끌어올려주는 구세주가 되고 싶어 하는 이 바람은 다른 모든 바람보다 힘겹다.

당연히 모든 것을 잘해야만 한다. 일에서 실수가 있는 것은 누구보다 내가 가장 버티기 힘들다.

창의력이 떨어지는 것도 내가 가장 보고 있기 힘들다. 누구나 가는 길로는 구세주가 될 수 없다. 누구보다 독특하고 잘해야지 침체된 것을 부양할 수 있다. 어린아이라도 알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지극히 잘 알고 있는 나를 보는 것이 너무 버겁다. 누구를 구하기는커녕 그런 나를 볼 때마다 내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면 그런 공상이나 다름없는 소망, 버리면 될 텐데.’


가장 쉬운 해법은 늘 존재한다. 구세주가 되는 소망을 포기하면 된다. 인간이 인간을 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전제해야 하는지 아니까, 그냥 편하게 놓아버리면 된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나는 구세주를 동경하고,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벗겨낼 수가 없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어이없는 꿈이라고 손가락질당하고 뒤에서 수군거려댄다 해도, 나는 그런 홀연히 나타난 존재가 되고 싶다.


이유는 단순하다. 나로 인해 구원받은 사람들의 웃음이 보고 싶어서다. 내가 완벽하게 누구를 구원할 수는 없겠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최소한 절망 속에 있을 때 나라는 사람을 통해서, 내 삶을 통해서 다시 살아갈 희망을 얻고 절망에서 빛 앞으로 나오게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웃음이 있다면 그걸로 좋다.

직접 보지 않고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 수많은 이의 추종자를 끌고 다니는 슈퍼스타보다 한 사람의 환희에 찬 얼굴을 보는 것이 더 행복할 것 같다.

잠시간의 꿈같은 구원이더라도 구원을 받은 이익도, 나에게도 꿈과 같은 시간일 것을 알기에 나는 구세주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할 수가 없다.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웃는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불가능한 일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내 삶이 소진되어버린다고 해도 그 또한 어쩔 수 없다. 나 혼자만의 행복이 아닌 누군가의 행복을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게 참 좋을 것만 같다.


꿈은 크게 가져야 한다.

그 격언에 맞게 이미 나만의 세계를 선보이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지만, 더 큰 꿈을 가져버렸다.

나한테 돌아오는 것은 오직 박수소리, 어쩌면 그것도 없을지도 모르는 초라한 큰 꿈을 가져버렸다. 희생이 필요할지도 모르는 그런 큰 꿈.

그리고 만약 꿈을 이룬다면 그 누구보다 멋있을, 벅찰 그런 꿈을 가지고 말았다.

누군가에게 ‘내가 있다’라는 말이 위로가 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만 싶다. 모든 능력을 넘어서 내 곁에 사람이라도 구할 수 있는 그런 구세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한 사람의 절망 가운데서 웃음을 만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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