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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 Jan 08. 2021

69. 기대주.

나는 기대감 속에서 태어났다.

위로 사촌누나만 8명인 친가에서 장손으로 태어났다. 친가는 큰 집이었고, 늘 보는 작은할아버지 집까지 합쳐도 내가 장손이었다.

외가에서도 처음 태어난 외손자였다. 집에서는 당연히 장남이었다.

아래로는 친동생이 셋이오, 가깝게 지내는 동생이 다섯이었다.

옛 왕족이나 귀족 집안이었다면 이 정도 적자도 없을 만큼의 적자였다. 기대를 안 받으래야 안 받을 수 없었다.


당연하게도 나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든 집안 사람들의 관심사였다.

내가 언제 걸었는지, 내가 언제 말을 뗐는지, 내가 무슨 학교를 나와 어떻게 지내는지 관심을 안 가지는 이가 없었다.

내가 잘되는 것은 모든 집안 수십 명의 기쁨이었다. 내가 엇나간다는 것은 모든 집안의 수심이었다.

어느 곳이든 풍족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나는 모든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자랐다.


그리고 그 상상만큼이나 어른들이 나에게 거는 기대는 컸다. 솔직히 말해 모든 집안사람들의 소망이 응집된 성배와도 같았다.

모든 ‘어른스러움’은 내 차지였다. 공부는 ‘당연히 잘해야만 하는 것’ , 어린 나이에도 동생들을 당연하게 ‘이끌어야 하는 것’, 감정은 당연하게 ‘뒤로 감춰야 하는 것.’

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어른들의 어른스러운 기대에 어른으로 대우받았다. 장손이라면, 첫째라면, 형이라면. 그 당연한 포지션에 대한 기대가 겹치고 겹쳐 모두 나에게 쏟아졌다.


모든 이들의 ‘첫 아이’로, 그리고 어른으로 키워진 나는 초등학교를 지날 무렵부터 지나치게 어른이 되어있었다.

모든 가족들이 실망하지 않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실망하지 않을 ‘아이’가 아니라 말이다.

당연하게 내가 사랑하는 일들은 ‘취미’가 되었다. 교양을 위해서 배워두면 좋은 정도의 취미.

‘그런 돈도 못 버는 일을 하면서 힘들어 하면 동생들의 본이 되지 못한단다.’  할머니 댁에서 잘 때마다 할머니가 내게 주문을 걸듯 충고하신 말은 내 머릿속에 딱 달라붙어버렸다.

동생들의 본이 되지 못할, 어른들이 걱정할만한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너무 많은 기대를 안아버린 어린 나에겐 힘들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설득하면 내 편이 돼주실 분들이라 해도 족히 열댓명은 되는 어른들의 기대를 하나 하나 설득하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어 보였다.


‘내 꿈은 의사가 되는 거예요.’, ‘내 꿈은 심리학자가 되는거에요.’ ,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거에요.’

그때 그 때 바뀌어 말했지만, 정작 내 꿈은 그게 아니었다. 공부하는 것은 좋아했지만 내가 정말 즐겁게 하고 싶었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자유롭게 춤추고, 노래하고, 그림 그리고, 글 쓰고, 겪지 못한 세상을 그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말해서 누가 즐겁겠는가. 어느 누구도 내 삶이 그렇게 불확실한 세상으로 던져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능하다면 안정적인 곳, 가능하다면 더욱 존경받는 곳, 가능하다면 다른 모든 이의 모범이 되는 곳. 그런 곳이 내가 있을 자리였다.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에 들어간 이후의 삶에 대해 많은 어른들이 벌써 기대하고 있었다.

‘분명히 대단한 직장에 들어가서 더 대단한 사람이 될 거야.’ 내 앞에서 말만 하지 않았지, 모두 만나기만 하면 그런 추측들이 가득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과분한 사랑과 기대였다. 나는 겁을 먹고 있었다. 나로서는 훌륭한 곳은 커녕 취직조차 잘하기 힘들다는 것만 같았다. 분명히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고 말 것 같았다.

어딘가 내 기대를 떨쳐낼 수 있을만한 곳이 필요했다. 마음 편하게 내가 조금 못해도 아무 상관 없을 곳이 필요했다.


내가 선택한 곳은 학군단이었다. 이왕 군대로 갈 거면 의무 복무라도 모든 어른들의 마음에 들만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학군단 후보생으로 있는 2년과 장교로 지낼 2년 반 동안은 그 어떤 어른도 내 다음 행보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어쩌다 보니 나는 그렇게 반쯤은 도피성으로, 반쯤은 명분을 위해 그럴 듯한 학군단으로 내 몸을 숨겼다.

숨겼다고 생각했다.


내 예상보다 학군단에 들어간 반응은 훨씬 좋았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까지 내 정복 사진이 핸드폰 메인사진이었다.

큰아버지는 어엿한 누나들도 있었는데 내 사진이 메인사진이었다고 했다. 기대감이 현실이 된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내 후보생 생활을 축하했다.

축하로는 벌써 장성이 된 것만 같았다. 그때 불현듯 느끼게 되었다.

내가 어떻게 기대에서 멀어지려고 한다 해도 나는 기대에서 멀어질 수 없었다.

내 삶 모두가 언제나 기대가 가득한 무대 한복판이었다. 나는. 꺼지지 않는 기대의 스포트라이트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번듯한 사람, 더 나은 사람이 되면 물론 좋았겠지만, 내가 어느 길을 선택하던 또 기대를 걸어줄 사람들이었다.

다들 내가 이 길을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거야. 최대한 모두가 만족할 사람이 되지 않은면 안돼. 나를 몰아 붙일 것이 아니라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말하면 그 길로 걸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기대가 줄어든다거나 하진 않겠지. 또 그 업계에서 내가 최고가 될 것이라며 기대하면 했지 기대를 버리진 않았을 것이다.

어느 쪽을 고른다 해도 그 과한 기대감들이 부담이 되는 것은 변하지 않았을 텐데, 그러면 차라리 내가 더 즐거워할 일을 고를걸 그랬다.


시간은 흘렀고, 아직도 나는 ‘모범적인’ 모습으로 가족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다.

안전하게 군에서 전역했고, 쉬지도 않고 바로 취직을 해서 매일매일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살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언제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조금 더 쉬는 시간을 줄여가며 디딤대를 다지고 있다.

글을 조금 더 쓰고, 시나리오를 정리하고, 될 수 있으면 그리도 조금 더 그린다. 언젠가는 가족들에게 내가 사실 사랑하는 일은 이런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었다며 말할 날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

그 누구도 나에게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최초의 팬이 되어 줄 것을 믿고 있다.

그야 나는 가족들의 기대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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