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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 Jan 09. 2021

70. 생각이 겹치는 날.

무슨 일을 해도 생각이 겹치는 날이 있다.

뭔가 엄청 대단한 생각을 했다고 느껴서 펜대를 잡았는데 이미 일찌감치 쓴 글감이다.

아이디어가 좋다고 생각해 정리해서 가져갔더니 이미 회사에서 한 번 진행하고 엎어진 일이다.

한숨이 나온다. 도저히 기운이 안 생긴다.


원래도 자신감이 없지만, 내 자신의 아이템과 겹친다던가, 이미 폐기된 아이디어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자신감을 밑바닥까지 꽂아버린다.

어정쩡하다고 생각만 했지,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미 써버린 아이디어를 좋다고 들고 오는 꼴이 너무 우습다.

그나마 마무리를 짓기 전에 알아서 다행이지, 이대로 그냥 마무리지었으면 그만한 망신이 없다.

뭐 창의적이니,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느니 글솜씨가 좋다느니 뭐 그런 소리를 해놓고 내놓는 게 복제품이라니, 누구에게 보여주어도 손가락질받을 일이다.


얼굴이 달아올라 당장 작성한 워드 파일을 다 지웠다. 하얀 백지가 모니터 앞에 떠올랐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온통 다 어디선가 보았던 아이디어, 이전에 썼다가 버린 아이디어, 남들도 이미 써버린 아이디어.

분명히 노트를 보면 아이디어가 수십 가지는 더 나올 거 같은데. 기억을 바다에 던져버린 것처럼 도저히 끌어올려지지 않는다.

무력감에 컴퓨터를 껐다. 이래 가지고 뭐 제대로 된 것을 만들 수 있을지, 또 하나의 글 뭉치를 만들어내는 게 아닐지 싶다.


내일은 아마 생각이 겹치지 않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잘 나올 수도 있다. 오늘만 그럴 수도 있지. 그런 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을 때면 너무 무섭다. 생각이 겹쳤는데도 겹쳤는지 모르고 좋은 생각이 났다며 잘난 듯 발표해버리게 될까 봐 무섭다.

세상이 손가락질을 안 할 수도 있다. 어차피 내가 내가 만든 것을 반복하는 것인데, 무슨 윤리적 문제가 있겠나.

하지만 진정 두려운 것은 새로운 것과 이미 만들어 낸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낸 글에 모두가 좋은 반응을 보일까 봐 무섭다.

나는 나를 반복한 것뿐인데, 창의력이라곤 티끌만큼도 없고, 영감이라곤 눈을 씻고 쳐다봐도 없는데 박수소리가 들릴까 봐 무섭다.

나는 새로운 것을 만들지 못하고 박수소리와 함께 자신이 새롭다고 도취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라는 예언과 같이 들리는 것이 무섭다.

이런 질문들이 창작자로 있을 수 없는 순간이 올 것 같다는 말로 들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의 도출이다.


나는 언제까지고 내 생각이 겹친 것을 알아챌 수 있을까? 집에 논문의 일치도를 비교한다는 프로그램이라도 가져다 두고 싶다. 이런 날이 많아질수록 나를 믿을 수가 없다.

가진 것이라곤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 밖에 없는데, 그마저도 어정쩡한데, 어정쩡한 것조차 내 안에서 반복되는 웅얼거림에 그치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다.

내 생각 속 바다에 빠져서 모든 가라앉은 기억을 대조하고만 싶은 기분이다.


정말 내일은 괜찮을까? 내일은 생각이 겹치지 않을까? 아니, 내일은 내가 이전에 쓴 글과는 다른 새로운 것을 만들어 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나는 창작자로 아직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확신이 가지고 싶다. 정말 내가 오늘은 다른 생각을 했다는 확신이 가지고만 싶다.


오늘은 생각이 겹치는 날이다.

몇 번의 문장이 겹쳤는지도 모르겠다. 이 글이 괜찮은지, 이전에 겹쳤는지도 확신을 못하겠다.

그저 이전에 지운 글은 더 얼굴을 들 수 없이 이전에 쓴 글과 같은 글이었다는 것만을 알고 있다.

도저히 기운이 나지 않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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