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박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by EZ

인간은 이야기다.


가후쿠와 그의 아내인 오토는 4살 된 아이를 죽음으로 잃었다.

이후 그들은 아이를 가지지 않았고, 둘의 관계 후 오토는 매번 이야기를 낳았다.

이야기는 그것를 낳아낸 오토를 닮아있다.

특히 오토가 가진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될 비밀, 그리고 그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과 닮아있다.


비밀이란 그 자체로 남에게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는 성질을 가진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은 권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 때로는 들켜버리고 싶은 비밀이 있고, 한편으로는 애써 모르고 싶은 비밀이 있다.

오토와 가후쿠의 경우가 그랬다.

오토의 이야기는, 오토는, 결국 가후쿠에 도달하지 못한 채 죽었다.


이야기는 사람에게서 태어나 다른 사람에게로 간다.


그렇기에 듣는이가 없는 이야기는 공허하다.

사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어려운 과정이다.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듣는이에게 온전히 도달하게 하는 것, 여기까지가 말하는 이의 역할이다.


이제 남은 것은 듣는이의 해석이다.

이야기를 듣는 바로 그 순간, 듣는이는 이야기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을 만들어낸다.

이야기가 해석되는 과정은 그 내부를 알 수 없는 *블랙박스를 거친 것과 같이, 입력과 출력만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자신의 해석을 이해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블랙박스를 열어보는 일이다.

블랙박스 회로를 알아내는 것은 곧 자신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다.


가후쿠의 블랙박스를 열어낸 것은 두 개의 이야기였다.

오토의 내연남으로, 오토가 낳아낸 이야기를 공유하는 ‘다카츠키’,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이야기를 가진 운전기사 ‘미사키’.


미사키는 홀어머니에 의해 길러졌다. 어머니는 술에 취해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잦았고, 사치를 부림으로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해소하려 했다. 어느 날 산사태에 의해 집이 매몰되었고, 홀로 빠져나온 미사키는 집 안에 갇힌 어머니의 구조를 요청하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집에 갇힌 채 죽었고 이 사건은 미사키에게 큰 죄책감과 상처를 남겼다. 미사키는 자신의 이러한 과거를 가후쿠에게 보여주며 자신의 상처를 드러낸다. 미사키와의 대화를 통해 가후쿠는 자신의 상처와 감정을 들여다보고, 미사키와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위로하며 치유받는다.


오토와의 관계에 대한 다카츠키의 솔직한 이야기 또한 가후쿠가 자신을 이해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친다. 다카츠키는 오토와의 관계가 단순히 육체적 관계가 아니라, 오토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감정적으로 연결되었던 관계였음을 이야기한다. 가후쿠는 자신이 듣지 못한, 다카츠키가 가진 오토의 이야기를 듣고서 그녀의 내면적 갈등과 외로움을 이해하게 된다.

두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가후쿠는 오토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직시하게 된다.

오토가 낳은 이야기는 가후쿠에게는 미결된 이야기로 남았지만,

오토의 이야기에 동행한 다카츠키에게는 완결된 이야기였다.

가후쿠는 오토와의 관계에서 본인과 가장 유사한 사람을 마주하였고,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자신과 가장 다른 부분을 발견하여

자신에, 자신의 이야기에 한 걸음 다가갔다.


마침내 그는 두 개의 이야기를 건너 온전히 자신을 이해하고 나서야, 오토에게 도달할 수 있었다.


지금도 수 없이 많은 이야기가 우리를 스치며 지나간다.

당신의 이야기가 원하는 곳에서 온전히 살아가기를.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온전히 보듬어 줄 수 있기를 간절히 응원하는 밤이다.


(*블랙박스 : 기능은 알지만 작동 원리를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기계 장치나 시스템, 물체이다.(출처:위키백과) 간단히 말하여 입력과 그에 따른 출력 값은 존재하나, 그에 이르는 중간 과정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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