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것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by EZ

세상을 ‘무’로 되돌리려는 멀티버스의 빌런을 저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중국계 이민자인 에블린은 빨래방을 운영하며 악착같이 살아내지만 형편이 좋지 못하고, 급기야는 국세청의 세무조사 대상이 된다. 가족관계는 천진한 남편 웨이먼드, 반항적인 딸 조이와 보수적이며 엄한 아버지.


국세청에서 세무조사를 받던 중 평행 우주의 남편에 이끌려 평행 우주에 다녀오고, 자신만이 평행우주의 파괴를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영화가 멀티버스에 맞춘 초점은 기존의 영화들과는 조금 다르다. 본래 존재하는 평행우주에 또 다른 ‘나’들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선택이 분기점이 되어 새로운 대체우주가 형성된다. 따라서 이 우주의 나는 내 모든 선택의 결과이며, 그와 동시에 다른 우주의 나는 나에게 있던 가능성 혹은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이다.


‘다른 평행우주의 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은 ‘버스 점핑’이다. 선택과 결과라는 견고한 인과관계를 떨치고 다른 우주로 이동하는 방법은 정반대로 어처구니가 없는, 통계적으로 개연성이 없는 행위를 통해 가능하다. (예를 들면 책생에 붙은 껌을 먹기)


다른 모든 사람들은 특정 우주로 가기 위해 특정한 특이행동을 하지만 에블린은 ‘random’한 행동을 하여 다양한 멀티버스를 이동할 수 있게 된다. 버스 점핑을 위한 행동의 모든 것이 무의미하기에 오히려 무엇이든 소중해질 수 있고, 이상하지만 다정하고 고유한 행동이 더 큰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영화의 빌런 조부 투바키는 알파-유니버스 에블린의 딸 조이이다. 알파-에블린은 버스 점핑을 발명하고, 자신의 딸인 조이를 극한으로 몰아가 조이는 모든 멀티버스에서의 자신을 체험하고, 자신과 세계의 소멸을 바라는 빌런이 되기에 이른다.


모든 것을 경험한 알파-조이가 세계의 파괴를 결심한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유니버스에서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경험하였기 때문인데, 역설적으로 모든 가능성을 경험하고 나니 더 이상의 가능성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로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떠한 세계에서도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 한계를 경험하고 무상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유일하게 경험하지 못했으며 통계적인 필연성을 가지는 ‘죽음’만을 바라는 허무주의에 빠진 것이다.


랜덤한 고유행동을 통해 모든 멀티버스를 경험한 이 세계의 에블린 또한 모든 가능성을 경험하고서 조부 투바키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조부 투바키의 강력한 능력에 고전한다. 다정함으로 싸우라는 남편 웨이먼드의 말처럼 모든 빌런의 과거를 살피고 그들의 결핍을 채워주는 다정함으로 이를 극복해 사랑하는 딸인 조이를 되찾는다.


인간은 그 자체로 근원적 한계가 있다. 모든 가능성을 체험하거나, 진리에 가까워졌을 때 오히려 허무주의에 빠지는 이유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러한 인간의 근원적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은 영화에서 제시하는 것과 같이 사소한 다정함, 그리고 진부하지만 사랑이다.


인간의 근원적 한계에 부딪히면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한계에 갇히게 되고 그것을 감싸주는 사랑이 존재할 때 비로소 벗어날 수 있으며,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하며 더욱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사소한 다정함과 사랑으로 이 세계를, 그리고 나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나에게는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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