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3
1.
고3 때 담임선생님 이름은 봉숙이었다.
a.k.a 봉숙쌤은 똑 단발에 숱 많은 무거운 앞머리, 동그란 안경을 쓴, 방금 검정고무신에서 튀어나온 듯한 비주얼이었다. 디스하는 게 아니고 봉숙쌤은 그 스타일이 찰떡같이 잘 어울렸고 이름과도 착 붙었다. 봉숙쌤은 국어 선생님이었는데 그것이 천직인 듯 매 수업시간마다 문학작품을 읽어주며 그 끝엔 항상 맥주 한 캔을 원샷한 듯한 감탄사가 끊이지 않았다.
“캬~ 죽이지 않니~ 모르겠숴? 이런.”
그런 봉숙쌤의 영향인지 마음에 드는 시를 읽을 때면 나도 모르게 맥주 한 캔을 원샷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찌든 수험생활의 유일한 오아시스가 소설과 만화책이어서였는지 자연스럽게 국어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런 국어를 사랑하는 봉숙쌤도 좋아했다. 그런 봉숙쌤에게 처음으로 실망이랄까, 아니 서운함을 느낀 건 수능이 끝나고 10대도 얼마 남지 않았던 시절의 어느 날이었다.
2.
친척이 안암에 살았는데 명절 때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어떤 학교를 보았다. 붉게 물든 호랑이 마크에 홀린 듯 고등학생이 된 나는 강렬하게 그 학교에 입학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1년이 좀 지나고 그건 불가능할 것 같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번엔 캠퍼스가 신전같이 멋있는 학교에 들어가고자 의지를 불태웠다. 그렇게 또 1년이 지나고 그것 또한 불가능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결국 다음 해 내 손에 쥐어진 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서울의 한 사립대와 지방 국립대의 입학 티켓이었다.
지금은 어떤 지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 인서울의 파워는 상당했다. 말은 제주로, 대학은 인서울로같은 어떤 절대적인 것이었다. 주변의 선생님들은 당연히 인서울의 사립대를 가야 한다며 학력주의사회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내게 압박을 주었다.
하지만 나는 망설였다. 합격한 전공은 같았고, 내가 고른 전공은 대학마다 학파가 달라 배우는 내용이 많이 달라지는 학문도 아니어서 어딜 가든 배우는 내용은 비슷할 것 같았다. 생활환경으로 따져 봐도 집에 가나 학교에 가나 뒷산이 있던 곳에서 자란 내게는 어느 쪽이든 그곳은 경험한 적 없는 대도시였다. 그런데 학비는 2배 이상 차이 났다.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담임 면담의 순서가 찾아왔다. 자상한 조언이 올 줄 알았는데 짧은 한마디만이 돌아왔다.
“선택은 네가 알아서 하는 거야”
순간 찬 바람이 쌩 불었다. 담임도 아닌 다른 선생님은 왜 서울로 가야 하는지 마주칠 때마다 열변을 토하는데 담임이자 좋아하고 신뢰하던 어른은 뭣도 모르는 내게 네가 알아서 하라며 딱 잘라 선을 그어버렸다. 뭐지? 책임지기 싫어서인가? 나중에 원망 들을까 봐? 당시의 나는 그렇게 느꼈다. 10년을 넘게 그 차가운 순간으로 봉숙쌤을 기억하고 있었다.
3.
며칠 전 맥주 대신 커피를 원샷하며 코로나로 매일이 비상사태인 회사 일을 마치고 내 방 책상에 앉았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건 뭘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봉숙쌤의 말이 떠올랐다.
“선택은 네가 알아서 하는 거야”
19살에 들었던 이 말은 너무 차가웠고 어른은 이렇게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 하는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는데 30대가 된 지금, 이 말은 참 다르게 다가온다.
사실 저 말은 성인이 되기 전 처음으로 타인에게 받은 가장 적절하고도 묵직한 조언이 아니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