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건방진 며느리
어떤 행사든 신혼부터 다녔던 나 늘 시댁 행사에 가면 주방 한자리를 차지하고 묵묵하게 일만했나이다.다른 며느리들은 행사에 참여한 적이 거의 없다.
유별난 남편덕에 어디든 따라다니고 누구든 갈 사람이 없으면 나 혼자라도 다녀야 했다. 모르는 사람들 틈에 끼여 밥만 먹고 오기도 했다.
얼마나 다녔는지 내가 가지 않은 행사에서 왜 같이 안 왔냐고 다들 궁금해하시고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행사에 다니지 않게 된 계기는 아프면 서다. 그전까지는 늘 어디든 가야 했다.
처음으로 한 종친 모임이 있었다. 모인 자리에 부모님을 모시고 갔다. 시동생들은 잠시 인사만 하고 올라가고 우리 부부는 자고 오게 됐다.
노래방을 싫어하고 노는 데는 관심이 없는 나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아버님을 챙기고 잠에 들었다 깼는데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어머님은 종부로 대접을 받으셨지만 나는 별 볼 일 없는 종부였기에 그냥 손부로만 기억되는 게 전부였다.
어르신들은 잠도 주무시지 않고 수다 삼매경 젊은이들은 그냥 한 구석에서 잠을 잤다. 새벽에 깨어나니 들려오는 소리가 있어 귀를 쫑긋하고 들어보니
어머님이 내 흉을 보시는 것이다. 함께 온 큰며느리 흉을 볼게 뭐람. 많은 친척들이 할머니 병시중을 한걸 아는데 일부로 자청해서 칭찬은 못할 망정 흉이라니 말이 되냐 말이다. 기가 찼다.
나는 욕심이 많아서 둘째를 미워한다는 것이다. 어르신들이 내가 미워하든 말든 알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아들을 낳지 않아서 심술이 나서 그런다고, 나는 할 줄 아는 게 없고 둘째 며느리는 칭찬 일색 내가 뭐가 되는가 싶었다.
함께 올라오는 내내 난 그 말이 떠나지 않아 무척 기분이 상했다. 올라오는 길에 남편이 대천해수욕장에서 일을 할 때였는데 거기로 모시고 가서 전복과 회를 사 드리고 올라오는 길에 전복까지 사주는데 난 괜찮다고 하니 거기서 또 핀잔을 주며 옆구리를 찌르는 것이다. 남편이 집에 올 때마다 전복을 가져와서 실컷 먹었기에 잘 먹는 스타일도 아니라 그냥 오려고 하니 그게 또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것이다.
주는 걸 거절하냐는 것이다. 뭐든 주면 받아오는 스타일이고 줘도 안 가져오는 스타일인 나와는 너무 달랐다.
욕심이 있었다면 함께 살지도 않았을 것이고 할머니 병시중은 왜 들었고, 성질 더럽고 폭력적인 시댁에서 왜 참으며 당신을 도와주며 살았단 말인가?
욕심을 내려놓았으니 산거라고는 생각은 못하나?
또 다른 사건은 더 기가 차게 만들었다.
명절마다 세배를 다녔다. 20년 동안 그것도 아프기 전까지다. 고모할머니가 살아계시는데 인사를 하러 갔다. 늘 가면 선물은 우리 돈으로 사가고 난 손님으로 가는 게 아니라 손부로 가기에 먼저 주방으로 가서 상차림을 도왔다. 밥상을 물리고 어머니 뒤에서 아이들과 함께 앉아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시건방진 며느리가 부부끼리 제사를 합쳐 지내고 있으니 죄송하다는 것이다. 뭔 × 같은 소리란 말인가. 고모할머니는 자신의 아버지 엄마 그리고 오빠 언니 제사에 한 번도 오신 적 없고 손부가 제사를 지내는데 미안해하셔야지 무슨 개소리를 하느냐 말이다.
제사를 내가 합쳐겠냐고 무슨 힘이 있다고 당신들이 합치라 해서 합친 것이고 시할머니는 돌아가시고 10년 제사 모시고 할아버지랑 합쳤는데 무슨 말 같은 소리를 하는지 기가 차다 못해 넘어질 뻔했다.
누군가 내 칭찬을 하면 한 마디씩 덧붙였다. 우리 며느리들 다 착하고 이뻐요라고 묻지도 않는 며느리들 이야기까지 꼭 하는 것이었다. 뭐 한 게 있어야지 손님 대접만 해 놓고 ,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큰 며느리 잘한다는 소리가 듣기 싫으셨는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하셨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왜 큰며느리 칭찬하는 꼴을 왜 못 봤는지. 동네 사람들도 아는 사실을 혼자만 모르쇠로 일관했는지 모르겠다. 남들에게 바른말은 잘하면서 자기 집 일은 바른 소리 한번 못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