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가 구원이 될 수 있을까

'아직도 글쓰기를 망설이는 당신에게'(박순우)를 읽고

너무 좋은 책을 찾았다.


한인회 도서실에서 우연히 고른 책인데 에세이 모임 회원들과 읽었다면 딱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같이 읽을 책을 이걸로 정하려고 구립 도서관 소장 여부를 검색해 봤는데 의외로 배치된 도서관이 거의 없다. 그다지 알려진 작가가 아닌데 이 책은 어쩌다 타국의 도서관에 오게 된 걸까.

자신을 드러내는 '에세이'를 쓰기 전 보면 너무 좋을 지침서. 글쓰기에 대한 기술적 설명보다는 글쓰기 전에 갖춰야 할 마인드셋에 대해 알려준다. 아무리 글쓰기 기술이 뛰어나도 진심이 담긴 내용이 없다면 알맹이 없이 껍데기 뿐인 글이 될테니.

처음 보는 작가의 책이라 사실 큰 기대 없었는데.

그동안 접했던 유명 작가들 못지않게 글쓰기에 관한 생각이 깊고 또렷하다. 이론이 바탕이 된 것이 아니라 글을 통해 달라진 자신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쓰였기 때문인 것 같다.


단숨에 후루룩 읽힌 건 아니었다.

해외 생활을 시작하며 변화에 적응하느라 그런지, 스마트폰에 너무 빠져버려 그런지 통 책에 집중이 안 되는 요즘이다. 한 문장을 여러 번 읽어야 했다. 어쩌다 집중해서 읽다 보면 공감하는 구절마다 나를 돌아보느라 자주 멈췄다. 한숨도 짓고, 울기도 하고, 희망도 품으며 아주 천천히 읽었다.


이 책이 특별히 더 와닿았던 이유는 저자의 과거가 지금의 나와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생각이 많고, 다른 사람을 많이 의식하고, 사소한 일에도 의미 부여하며 부정적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하지만 아직 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와 달리, 저자는 어느 순간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자각을 하며 글로 변화했다.


물론 나도 변하고자 글을 썼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내 생각을 지배하고, 사소한 일에도 과하게 흔들리는 나약함을 벗어나고자 운동, 상담, 글쓰기 등 여건이 되는대로 다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쓴 글들을 모아 작은 책으로도 냈다. 글쓰기 모임을 통해 좋은 인연을 만났으니 그 시도들은 가치 있었다.


다만 글쓰기가 나에게 '치유'와 '변화'까지 가져다주진 못했다.

글쓰기 전과 후의 나는 여전히 자주 외로워하고, 감정을 다루는 데 미숙하며,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산다. 글쓰기를 통해 크게 변화되지 않은 걸 보면 글쓰기조차 나에게 맞는 방법이 아닌 걸까. 자꾸 나이는 먹어가는데 또 어떤 방법을 찾아야 하나.


이 책을 보고 알았다. 글을 통해 변하지 못한 이유는 '예쁘고 편한 글'만 썼기 때문이라는 걸. 그동안 썼던 글은 아이, 남편, 친정과 시댁 부모님, 운동이나 책 등 내 주변부에 관한 내용뿐이었다. 감정의 동요 없이 바라볼 필요 없는 소재들이라 적당히 생각하고 가볍게 쓸 수 있었다. '나'에 대한 건 몇 줄 정도로 아주 간단히 언급했을 뿐이다. 사람들이 숱하게 말하는 '나를 직면하기'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사실 예민한 촉수를 지닌 나는 생활 속에서 숱하게 내 본모습을 직면한다.

가깝고 약한 존재 앞에선 권위를 내세우며 내 의견을 받아들이길 강요하는 강약약강의 모습, 공부 잘하는 것보다 건강하고 밝은 마음을 가진 게 훨씬 값지다 말하면서 친구와의 시간보다 문제집을 먼저 들이미는 이중성, 조금이라도 어버버한 모습 보이는 게 창피해 짐짓 쿨한 척하며 최선을 다하지 않는 나태함, 아이에겐 감정에 솔직하라고 어떤 일에든 용기를 내라고 가르치면서 정작 내 자신은 불편한 상황에서 뒷걸음질 치는 소심함, 혼자일 때 불안하여 끊임없이 의지할 무언가를 찾는 나약함 등.

무딘 사람이라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면 좋았을까. 이런 모습을 알아채고 후회하는 과정의 반복은 꽤 힘들다.


순간순간 그런 내 모습을 알아챌 때마다 잠시 질색하지만 거기서 끝이다. 책이나 술, 다른 생각으로 후다닥 덮어버리곤 했다. 그런 내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글로 풀어낸 적이 없고 그럴 용기도 없다. 잠깐 알아채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빠지고 슬퍼지기 때문이다.

헌데 그런 나를 드러내야 치유가 된다고 한다. 그래야 변화할 수 있다고 한다.


지금도 내 모습을 부인하고 싶고, 가능하다면 다른 나로 바꾸고만 싶은데, 그런 모습을 낱낱이 펼쳐놓으면 과연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내 모습을 직면한 끝이 결국 '내 인생은 그냥 이만큼' 이라는 결론이면 어떡하지.

저자가 책에서 자신의 경험을 여러 번 이야기하며 격려해 주는데도 앞을 가로막는 두려움이 크다.


2년 전부터 글쓰기 모임을 한다. 따뜻하고 배울 점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 나에게 참 소중한 모임이다. 그래서 내 부족함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멋지고 좋은 사람인 그들과 함께 하기에 내 진짜 모습은 너무 후지니까.


전에 은유 작가가 진행한 글쓰기 관련 온라인 모임 때 이런 상황에 대해 질문했었다. 모임에서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이런 마음이 있는 그대로의 내 얘기를 쓰는데 방해가 된다고. 그때 작가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럼 모임에서 나와야죠."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

그 모임은 그나마 글을 통해 마음이 소통하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집에서 의무로만 가득한 시간에 위로와 격려 섞인 수다를 주고 받는 곳.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 혼자 모자란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 진짜 모습을 보여주진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넘어야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응원해 줄 거야 라는 믿음이 생길 때, 그땐 지금의 허들을 넘고 나를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겠지.



그때는 글쓰기가 나에게 구원이 되어줄 수 있을까.





작가의 이전글떠나고 싶은 거 맞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