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하는 나를 조련하는 아내

날이 더워서 그랬어

by 투덜쌤

날이 참 덥다


1.


아이의 정기검진이 있어 병원에 갔다. 일단 접수를 먼저 해야 하기에 병원 입구에서 내려주고, 나는 지하주차장에서 올라갈 생각이었다. 사람 많은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지하주차장의 편한 차 안에서 있다가 올라가면 얼마나 좋을까? 내 잔머리는 거기부터 시작되었다. 이왕이면 천천히 올라가는 걸로 이야기를 해 봐야지.


지하주차장에서 있다가 올라가면 되지? 어디로 가야 해?

- 왜 거기 있으려고? 주차장에서 뭐하게?

아니 어디로 가야 하냐고? 진료보는 곳으로 찾아가면 될까?

- 맨날 같이 왔으면서 새삼스럽게 물어. 어딘지 알잖아

그러니까 바로 오라고?

- 지하주차장에서 애랑 있으면 뭐하려고?


그래서 어쩌라고!!!


2.


터져버렸다. 순간 욱하면 목소리가 달라지나 보다. 내 목소리 톤이 올라가고 말이 빨라지고.


아니 왜 질문을 하면 대답을 해야지 왜 자꾸 말을 돌려? 그냥 주차하고 아이랑 같이 올라오라고 이야기하면 되잖아!

- 으이구. 애가 누굴 닮았나 했더니 딱 아빠 닮았구만. 욱하는게 말이야


그제서야 알아버렸다. 내가 흥분했구나. 이런.


3.


아내랑 왠만하면 말싸움을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조곤조곤 따진다고 했는데 늘 내가 분을 참지 못하고 말았다. 어쩌다 내가 논리적으로 이길만 하면 감정적으로 토라지는 탓에 결국 내가 먼저 항복선언을 하고 말았다. 뭐,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거지. 이건 나의 위안이다.


그게 나쁜 효과를 준다고는 생각하지만, 아내는 가르칠 대상은 아니었다. 물론 나도 바꿀 생각이 없던거고. 어쩌면 지극히 이기적인(?) 두 인간들이 모여서 서로 양보했다고 서로 져줬다고 이야기하는 꼴이다. 그걸 아는데 10년도 넘게 걸린 듯 했다. 아마 우리 생활에 위기가 있었다면 그 때가 아니었나 싶다. 서로 말도 안하고 일주일이나 버텼던 그 때.


4.


아빠가 순간 욱했니?


아내를 내려주고 주차장으로 들어갈 때 뒷자리에 있는 아이한테 물어봤다. 백미러로 보이는 고갯짓. 위 아래였다.


아빠가 틀린 이야기 했냐?

- 음. 이어폰을 끼고 있어서 내용은 못 들었어. 그런데 아빠가 화가 나면 목소리 톤이 바뀌는데 딱 그 소리였어요.


내가 오해했던 거다. 화내지 않았는데. 그냥 따지기만 했다고 생각했는데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게 아니었군. 그러고보니 예전에는 이렇게 화내면 금새 삐지고 한동안 말을 안 했던 아내였다. 순간 이후의 일이 조금씩 걱정되었다. 그래도 아이 앞에서 싸우는 꼴을 보여주면 안되지.


5.


진료실 앞에서 아내를 만났다. 역시나 긴 대기시간. 간신히 자리를 잡고 세사람의 어색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화제를 돌려야 한다.


우리 점심 먹을 곳 고르자!


늘 그렇듯이 아이는 관심없고, 아내는 뾰루퉁하고. 결국 나의 작전이 시작된다. 지도앱에서 맛집을 찾아 이것 저것 검색한다. 우리 집의 외식 메뉴는 최종적으로 아내의 결재가 필요하기 때문에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이것 저것 브리핑을 시작한다. 역시나 맛난 메뉴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법이다. 이것 저것 고르다가 특별하게 동남아 음식을 먹기로 결정했다. 아이가 시큰둥하지만 오늘은 니가 주인공이 아니란다. 하하하.


6.


내가 누군가를 맞춰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누군가도 나를 맞춰가고 있다는 것.

살면서 제일 가까운 사람도 그러고 있다는 걸 잊곤 한다.

아깐 미안했다고 슬쩍 건네는 말에, 뭐 한 두 번인가? 희미하게 웃는 아내한테 고마웠다.

까탈스럽고 막무가내인 아내라고 생각하지만, 나도 아내에게 그렇게 만만한 존재는 아닐터.

내가 행했던 배려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알고 보면 아내의 이해 덕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뭐 이렇게 살다가도 또 한 번 욱하는 순간이 온다면 목소리는 분명 커질거다.

다만 그 때는 지금보다 수습하는 시간이 좀 더 빨라지겠지.

티격티격대시지만 그래도 잘 살아가시는 우리 부모님처럼.




날이 참 덥다

그냥 더워서 생겼던 해프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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