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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한성 Mar 04. 2019

독립의 씨앗을 뿌리다: 여운형과 신한청년당

1929년 7월 17일 오후 6시 50분. 한 남자가 용산역 계단을 내려온다. 흰색 바지에 감색 재킷을 걸치고 멋들어지게 나비넥타이까지 한 건장한 체구의 신사다.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진다. 기자들은 수원역부터 동승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취재하는 중이다.


이날의 장면이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공교롭게도 사진의 초점은 날카롭게 카메라를 쏘아보는 사복경찰의 얼굴에 맞았다. 위아래 흰색 정장에 파나마모자를 쓴 그는 엄중한 현장을 상징이라도 하듯 경계의 빛을 드러내고 있다. 초점이 맞지 않은 주인공은 흐릿함 때문인지 더욱 황망해 보인다. 구겨진 재킷과 손에 든 커다란 가방이 그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 같다.


용산역을 내려오는 여운형.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소장)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의 언론들은 연일 그의 이야기를 전하느라 바빴다. 한 신문은 그를 ‘조선의 링컨’, 조선의 노예해방 선구자로 호명했다. 그가 청년기에 누구보다 먼저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켜 만민평등의 사상을 실천했던 일을 두고 이르는 말이었다. 


다른 신문은 도쿄에서 거침없이 조선독립을 주장해 일본 정계를 놀라게 했던 1919년의 일을 떠올렸다. 일본 정부는 그를 회유해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데 이용하려다가, 오히려 그가 이것을 조선독립을 선전하는 기회로 삼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

 

홀연히 고국을 떠난 후부터 지금까지 십수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했다. 언제나 민족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독립에 도움된다면 아무리 힘든 일이라 해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조선에 돌아왔다. 자유를 잃고 날개가 꺾인 채 조국 땅을 다시 밟았다.


한 기자가 말한다. 도대체 누구기에 전 조선이 이렇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냐고. 과연 그는 누구인가? 그는 조선독립운동의 씨앗을 뿌렸던 몽양 여운형(呂運亨)이었다.



모든 일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독립운동을 시작할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하라.”


경찰의 물음에 여운형은 기억을 더듬었다. 독립운동을 시작했던 시절을 떠올리자 생각만으로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암흑 같던 하늘에 한줄기 빛이 비췄던 날,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던 시절. 그의 인생에 그만큼 충만했던 시간이 또 있을까.


1918년 11월 27일 상해 칼턴 카페에서 크레인의 환영회가 열렸다. 여운형은 이날 칼턴 카페에 1천여 명의 인파가 운집했고 자신도 그중 한 명이었다고 했다. 환영회 석상에서 크레인은 이렇게 연설했다.


“파리강화회의는 중대한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각국의 감정과 오해를 제거해 진정한 세계평화를 이룩하고 피압박민족을 해방하는 것입니다. 피압박민족에게 이것은 최적의 기회입니다. 중국은 대표를 파견해 피압박 상황을 말하고 해방을 도모해야 합니다.”


여운형은 크레인의 연설에 크게 감격했다. 연설은 중국인들을 향한 것이었지만, 중국인들만 위한 것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파리강화회의의 사명이 세계평화와 피압박민족의 해방에 있다면, 그것은 조선인들에게도 놓칠 수 없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환영회가 끝난 후 여운형은 감격과 기대 속에 급히 면회를 요청해 크레인을 만났다.

 
“그래서 그 후 어떻게 했는가?”


일본 경찰이 답변을 재촉한다. 크레인과의 만남 이후 여운형은 동지들과 상의 끝에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두 통의 독립청원서를 작성했다.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미국 대통령 윌슨과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청원서를 완성하고 나자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청원서의 서명을 어떻게 할지가 문제였다. 개인의 이름으로 서명하자니 청원서의 무게가 너무 가벼워지고, 단체의 이름으로 하자니 적당한 단체가 없었다. 여운형은 이참에 그해 8월부터 함께 독립운동을 고민해왔던 동지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만들기로 했다. ‘신한청년당’이었다. 


청원서의 서명은 ‘신한청년당 총무 여운형’ 명의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신한청년당은 청원서 서명만을 위해 만든 조직은 아니었다. 여운형은 터키청년당을 모방해 국권 회복뿐 아니라 조선의 풍속, 문화, 도덕을 새롭게 한다는 목표로 당원을 모으고 조직을 발전시켜나갔다.


“그건 조선인으로서 불가피하게 걸어가야 할 길이오


경기도경찰부의 심문은 7월 18일부터 27일까지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한 후부터 1929년 체포될 때까지 여운형의 삶 대부분을 낱낱이 들여다보겠다는 심사였다. 지루한 문답이 이루어지던 어느 날 경찰이 문득 물었다.


“조선 도착 후 감상은 어떠하던가?”


“상해로 건너갈 때는 막 세계대전이 벌어졌을 때라, 10년이나 15년이 지나면 세계의 대세도 크게 변하지 않을까, 그래서 언젠가는 영광스럽고 빛나는 귀국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몽상했었소.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일장춘몽이 되어 경찰에 붙잡힌 채 이 산하를 접하니 비분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소. 이게 내 첫 번째 감상이오. 그다음은……”


“그다음은?”

“부산에 내려 해안 일대의 산을 보았소. 전에 본 민둥산이 일변하여 청산이 되어 있어 놀라웠소. 그러나 해안에 있는 동포의 부락을 보고 변화 진보의 자취를 찾지 못해 자못 실망했소. 총독정치가 민둥산을 청산으로 만들 수는 있어도 인민의 삶은 어쩌지 못하는가보오?”


“넌 독립운동을 그만두려는 의지가 전혀 없는가?”


“예전부터 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으니 이제 와서 아무리 탄압을 가한다 해도 그 신념은 변하지 않을 거요. 그것이 내가 명령받은 사명이고, 조선인으로서 불가피하게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조선으로 돌아온 여운형의 가족. (《동아일보》, 1929년 9월 16일)

1929년 8월 8일 검찰은 여운형을 기소하고 예심에 회부했다. 1919년 제령 제7호 및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였다. 


그의 예심청구서에는 모두 여덟 개 항목의 범죄 사실이 기재되었다. 그중 첫 번째가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한 혐의였다. 검찰은 이를 ‘정치적 변혁을 목적으로 다수 공동의 안녕질서를 방해’한 범죄로 규정했다. 


이날 용수를 쓰고 검사국을 나오는 여운형의 모습이 한 언론의 사진기자에게 포착됐다. 9월 16일엔 전날 상해에서 돌아온 가족의 사진도 실렸다. 여러모로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3.1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930년 4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김병로(金炳魯) 등 변호인이 출석한 가운데 여운형에 대한 첫 번째 공판이 열렸다. 검사는 징역 5년을 구형했다. 검사의 구형은 죄질에 비해 너무 과한 것이 아니냐는 세간의 평가를 받았다. 더구나 예심에서 법리상의 문제로 제외된 치안유지법을 다시 적용해 구형한 것은 논란을 부르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4월 26일 열린 언도 공판에서 판사는 여운형에게 1919년 제령 제7호만을 적용해 징역 3년을 선고했다. 검사의 논리가 억지였기에 당연한 결과였으나, 결과를 놓고 보면 이미 양자 사이에 짜여진 각본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여운형은 항소했다. 이미 오래전에 벌어진 일을 가지고 3년의 실형을 언도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이었다. 2심 공판은 6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렸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다르지 않았다. 검사는 징역 5년을 구형했고, 판사는 징역 3년을 언도했다. 답은 정해져 있었고 이의제기는 허락되지 않았다. 재판은 더이상 의미가 없었다. 여운형은 상고를 포기했고 재판은 그렇게 끝났다.


여운형은 인간의 가장 소중한 권리인 자유를 잃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진 않았다. 그는 여전히 많은 것을 지킬 수 있었다. 신한청년당의 젊은 동지들, 만주와 연해주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 그리고 함께 조국의 독립을 꿈꿨던 수많은 사람들의 비밀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세상이 아무리 암울하다 해도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종말이 아니었다.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면 세상은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세상은 언제나 바꾸려는 자들의 것이었다. 1919년, 그해도 그랬다. 어느 누구도 미래를 알진 못했지만, 기꺼이 일어선 자들이 역사를 만들어갔다. 3.1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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