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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한성 Mar 11. 2019

그토록 숨기려고 했건만: 비밀 파견원 송계백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후, 천도교인들은 독립운동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결정은 쉽지 않았다. 독립운동을 결심하는 순간, 목숨까지 각오해야 할 만큼 많은 희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번 일로 교단이 순식간에 공중분해될 수도 있었다. 


천도교인들은 미주와 상해, 시베리아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듣고 난 후, 함께할 동지의 존재가 상당히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독립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최종 결심은 손병희의 몫이었다. 그런데 천도교인들이 고민을 끝내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었다. 


비밀리에 일본에서 귀국한 조선인 유학생 송계백(宋繼白)이었다.


2.8독립선언서의 초안을 가지고 조선에 들어왔던 송계백(두 번째 줄 오른쪽 끝).


1919년 1월 6일 일본 유학생들은 동경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웅변대회를 통해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공유했다. 그들은 임시실행위원을 선출해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일본 각계와 각국 공사관에 송부하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유학생들은 임시실행위원 중 한 명인 송계백을 조선에 보냈다. 자신들의 계획을 국내에 알려 조선의 독립운동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천도교의 젊은 지도자 최린의 회고에 의하면, 보성학교장 시절 학생이었던 송계백이 자신의 집에 찾아온 것은 천도교 수뇌부가 독립운동을 결정했을 무렵이었다. 송계백은 일본 유학생들의 동향과 결의사항을 알려주고, 모자 안 내피를 뜯어 명주헝겊에 적어온 2.8독립선언서의 초안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앙고보 교사였던 현상윤의 회고는 최린과 차이가 있다. 현상윤은 송계백이 맨 처음 최린이 아니라 자신을 찾아왔다고 했다. 1919년 1월 초순경이었다. 바로 전해까지 와세다대학 유학생이었으니, 송계백이 유학생 선배 현상윤을 먼저 찾아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송계백은 모자 내피에서 선언서의 초안을 꺼내 보여주었다. 현상윤은 이를 송진우에게 보여줬고, 때마침 그들을 방문한 최남선에게도 보여주었다. 현상윤은 독립운동 참가를 망설이던 최남선이 송계백을 만난 직후 독립운동 참가를 결심했다고 회고했다.



두 명의 다른 회고진실은 무엇인가?


현상윤은 선언서 초안을 최린을 통해 손병희에게도 보여주었다고 했다. 손병희는 “어린 학생들이 저렇게 운동을 한다 하니 어찌 앉아서 보기만 할 수 있느냐”며 그날로 최고간부회의를 열어 독립운동 참가를 결정했다고 한다. 


최린은 송계백이 오기 전에 독립운동을 결정했다고 했지만, 현상윤은 송계백을 만난 후 독립운동을 결정했다고 한다. 누구의 말이 맞을까?


“국권을 회복할 계획을 세우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손병희는 경찰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얼마 전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조선 독립을 위해 당국에 의견서를 제출했다고 들었소. 또 조선에 있는 학생들도 총독부에 국권회복의 의견서를 제출한다는 소문도 들었소. 나는 이러한 일을 학생들이 함부로 일으켜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소. 그래서 1월 20일경 권동진, 오세창, 최린을 자택으로 불러 함께할 동지가 있다면 우리들이 직접 해보는 게 어떠냐고 물었소.” 


“그래서?”


“그때는 일단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고 헤어졌소. 그런데 10여 일이 지난 후 세 명이 찾아와 말하길 함께할 동지가 상당수 있고, 그중엔 기독교인들도 있다고 했소. 그래서 결정하고 오늘까지 진행해온 것이오.”


손병희의 답변을 고려한다면 최린의 말보다는 현상윤이 말이 좀더 진실에 가까워 보인다. 


손병희. 그의 결정으로 천도교인들의 독립운동이 시작됐다.



천도교인들이 필사적으로 숨긴 사람


송계백이 다녀간 후, 천도교 인사들은 일체 사실을 함구하는 것으로 송계백을 보호하고자 했다. 최린은 송계백을 만났을 때 송계백의 안위를 걱정해 모든 일을 자신에게 맡기고 경성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가라고 충고했다. 부모의 병을 핑계로 귀향한 후 기회를 봐서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송계백이 최린의 충고를 따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향을 방문한 건 사실인 것 같다. 그 후 그는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가 2.8독립선언에 참가했다. 그리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도쿄지방재판소에서 금고 7개월 15일을 언도받고 도쿄감옥에 수감됐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1919년 7월 중순, 송계백이 조선에 다녀간 사실이 일제 공안당국에 알려지고 말았다. 최남선과 연결되어 연락 역할을 하던 일본 유학생 출신 정노식의 진술을 통해서였다.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는 도쿄지방재판소에 송계백을 심문해달라고 요청했고, 7월 16일 도쿄지방재판소 예심판사가 그를 심문했다. 예심판사는 송계백이 1월 29일경 정노식을 만나 일본 유학생의 독립운동 상황을 말하고, 조선에서도 운동을 일으키도록 권유한 적이 있는지 추궁했다. 


송계백은 정노식을 만난 건 1월 말이 아니라 2월 초순이었으며, 일본의 상황에 대해 얘기한 적은 있지만 운동을 권유한 적은 없다고 부인했다. 예심판사가 정노식을 만난 이유를 묻자, 그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데 필요한 조선어 활자를 사서 돌아가는 길에 예전에 친했던 정노식을 잠시 만났을 뿐이라고 진술했다. 


송계백은 조선의 독립운동을 촉구하고자 했던 원래의 조선 방문 목적을 은폐했고, 천도교 인사들을 만났던 사실도 철저히 숨겼다. 조선어 활자를 구입하기 위해 조선을 방문했다는 진술은 허위 진술이거나, 자신의 방문 목적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낸 이유였을 가능성이 높다. 



독립운동을 조선에 전파한 일등 공신


송계백의 투쟁은 성공했다. 그는 비밀을 지키는 데 성공했으며 독립운동을 조선에 전파하는데 일등 공신이 되었다. 


천도교인들은 기독교인, 불교인들과 손을 잡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했고, 경성 등 전국 7개 도시에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를 벌이는 데 성공했다.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은 자신들의 역할을 독립선언으로 한정하며 3.1운동의 지도를 포기했지만, 독립선언으로 거족적인 3.1운동을 일으키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이것이 그들이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이었다.


도쿄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송계백은 조선에 다녀온 사실이 드러나면서 새롭게 일제 공안당국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수감생활에 악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그는 자신의 몸이 축나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송계백은 감옥에서 풀려난 후 1922년 1월 27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최린은 회고록에 송계백과 작별한 후 소식을 알 수 없어 궁금하다고 썼다. 그가 회고록을 쓴 것은 1948년 무렵이다. 이때까지도 최린은 제자 송계백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고 한 것이다. 최린은 이후 변절하여 친일부역행위를 하며 편안한 여생을 보냈다. 해방 후까지도 제자 송계백의 소식을 몰랐던 것이 달콤한 삶에서 오는 무관심의 결과가 아니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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