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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한성 Mar 18. 2019

‘독립청원서’가 ‘독립통고문’이 된 이유

천도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이 합동하기까지 독립운동의 방법을 두고 상당한 의견 차이를 보였다. 천도교인들은 독립선언의 방식을 주장한 반면, 기독교인들은 독립청원의 방식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천도교 측 최린은 이번 독립운동이 민족자결주의라는 외부적 정세의 영향하에서 제기된 것인 만큼 민족자결의 의사를 명확히 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정부에 청원하는 것은 단지 당사자에 대해 의견을 진술하는 것뿐이므로 민족자결의 의사를 충분히 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독립운동의 방법은 기독교인들의 양보로 천도교인들이 주장했던 독립선언의 방식으로 결정되었다. 이와 함께 양측은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의회, 각 정당의 수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청원서를 보내고, 파리강화회의와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조선의 독립을 승인해주길 바라는 탄원서를 함께 제출하기로 했다.


사실 독립선언을 하든 독립청원을 하든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최종적으로 일본의 양보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두 가지 운동방법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었다. 둘 다 기본적으로 일본의 선의와 열강의 자비심에 기댄 수동적인 운동방법이라는 점에서 그 한계가 출발부터 분명했던 것이다. 


하지만 독립청원이 상대의 답변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온건한 것이었던 반면, 독립선언은 참가 주체의 의지가 드러나는 운동방법이어서 경우에 따라서는 기대치 못했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이것이 두 가지 운동방법의 차이였다. 기독교인들이 독립청원을 선호하면서 되도록 독립선언을 피하고자 한 것은 되도록 온건한 방법으로 독립의 의사를 표현하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측이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의회와 각 정당 대표에게 보내기로 했던 독립청원서가 최종 단계의 어느 시점에서 독립통고문으로 바뀌었다. 민족대표 33인은 대부분 이 문건을 독립청원서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일제 당국이 증거로 들이댄 문건에는 독립통고문이란 글자가 선명히 찍혀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독립청원서엔 원래 제목이 없었다


기독교 장로교의 지도자 이승훈은 청원서가 통고문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공안 당국의 심문을 받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했다. 판사는 그 문건의 내용이 청원서라기보다 통고문이라 하는 것이 더 적합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이승훈은 문건을 보긴 했지만 내용까진 읽어보지 않아 모르겠다고 했다. 


사실 이승훈과 같은 이가 문건의 내용을 읽어보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독립선언서와 독립청원서의 작성은 천도교의 책임하에 최남선이 집필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 입장에서는 선언서와 청원서가 자신들의 의사에 부합하는지 반드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설사 이승훈이 문건의 내용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고 해도 2월 27일 문건을 검토한 기독교인은 아홉 명이 더 있었다. 그들 중에 누군가는 반드시 문건을 읽고 평가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런데 이날 문건을 본 기독교인들은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모두가 이 문건을 원래 의도한 것과 다르지 않게 청원서로 읽었던 것이다.


판사는 문건을 쓴 최남선에게 어찌된 일인지 추궁했다. 최남선은 자신이 쓴 초안엔 제목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독립통고문’이란 제목은 누군가가 나중에 덧붙였던 것이다. 판사는 최남선에게 내용상 청원서로 쓴 것인지 통고문으로 쓴 것인지도 물었다. 최남선은 일본의 결단을 촉구한다는 취지로 쓴 글이라고 했다. 굳이 말하자면 청원서보다는 통고문에 더 가깝다는 대답이었다. 


독립선언서와 독립청원서의 작성을 주도했던 최린은 청원서가 통고문으로 바뀐 사태를 알았을까? 최린도 초고엔 제목이 없었다고 했다. 문건을 준비하면서 여러 차례 회의했지만 통고문이라는 제목을 넣기로 한 적도 없다고 했다. 최린은 최남선에게 청원서를 써달라고 했지 통고문을 써달라고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또 너무 바빠서 자세히 보진 않았지만 당시에 봤을 때는 청원서에 적합한 글이라 여겼다고도 했다. 최린의 진술이 맞다면 도대체 ‘독립청원서’는 왜 갑자기 ‘독립통고문’이 된 것일까?


천도교의 독립운동 실무를 담당한 최린(좌)과 기독교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이승훈(우)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제목을 붙인 사람은 누구인가?


일본 정부와 의회, 각 정당 대표에게 문건을 전달하기 직전, 문건에 ‘독립통고문’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가 있었다. 문건의 전달을 책임진 임규가 바로 그였다. 그는 최남선의 초안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정자로 깨끗하게 옮겨 적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문건의 내용에 맞게 적절한 제목을 붙였는데, 그것이 ‘독립통고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의문은 남는다. 최남선이나 임규는 이 문건의 성격이 독립청원서보다 독립통고문에 더 부합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린이나 기독교인들은 이 문건을 독립청원서로 읽었다. 왜 그런 걸까? 실제로 이 문건의 내용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의 강제병합과 식민지 통치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제 2천만 전 민족의 희망을 걸고 조국 부흥의 첫 깃발을 높이 들면서,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 필연적으로 최대한 우호를 지속하지 않으면 안 될 일본 전체에 우리의 본의를 밝히는 것이 가장 정당한 일이라 믿고 감히 거친 말로 명확한 판단을 촉구하는 바이다.” 


최남선이 말한 것처럼 이 글은 일본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굳이 말한다면 청원보다는 통고에 가깝다. 하지만 최린이나 기독교인들처럼 이 글을 청원서라 생각하고 읽어도 크게 어긋날 부분은 없었다.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청원’이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게 표현이 조금 강렬하다는 점뿐이었다. 



부족함을 채워 독립운동의 방법을 완성하다


문제는 문건에  ‘독립통고문’이란 제목이 붙으면서 시작됐다. ‘통고’라고 정해지자 그때부터 청원보다는 통고에 더 적합한 글로 느껴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통고에 더 적합한 글을 써놓고도 그것을 굳이 청원이라 이름 붙였던 민족대표 33인의 태도가 문제의 근원이었다. 민족대표 33인은 정치적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온건한 태도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에 ‘통고서’가 아니라 ‘청원서’를 제출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을 ‘비겁하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을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조선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돋보이는 것은 임규의 행동이다. 그는 청원서를 읽고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다. 그는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내용에 어울리는 제목을 덧붙였다. 그의 행동으로 인해 독립운동의 방법이 완성됐다. 민족은 독립을 선언했고, 그 내용을 일본에 통고했다. 통고문은 이렇게 끝맺는다.


우리를 외롭다고 말하지 말라. 16억의 양심이 우리를 후원한다. 우리를 약하다고 말하지 말라. 2천만의 심인(心刃, 마음속 칼날)은 우리의 무기다. 아아, 세계는 바야흐로 정의와 인도 위에 일대 부활을 수행하려 한다. 조선과 조선인은 이제야 생존과 존영에 대한 철저한 자각을 지니고 있다. 거듭 말하겠다. 시대는 개화하고 있고 조선인은 자각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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