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도 삶도 잘 머무르는 법을 배운 두 달
이따금 삶이 멋대로 흘러가서 잠시 놓아버리고 싶을 때 나는 베를린을 생각한다. 그때처럼 하루와 ‘잘 지내보기’ 위해 애썼던 순간이 또 있을까.
자취 경력 9년 차(그사이 올해로 꼬박 11년 차가 되었다.). 살뜰하게 꾸려낸 일상을 매일같이 돌보는 데에서 깊은 안정을 느끼는 내게 여행은 관심 밖의 대상이었다. 그 흔한 제주도도 수학여행과 출장으로 한 번씩 다녀온 게 전부이며 해외여행 역시 친구들의 강압에 못 이겨 떠난 홍콩과 대만, 방콕 정도로 단출하게 정리할 수 있다. 나의 여행은 줄곧 사무적이거나 수동적인 형태로만 이어져 왔다.
그런데 이십 대 후반에 3년 가까이 잘 다니던 회사를 단지 ‘지루하다’는 이유로 퇴사하고 나니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는 불안감에 ‘역시 여행밖에 답이 없는 건가’라는 생각에 휩싸였다. 별안간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 절실해진 스스로가 낯설 정도였다. 물론 한동안 이어진 불안의 원인이 나를 둘러싼 공간이나 환경 때문이 아니었음은 떠난 다음에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아무튼 나는 그동안 다져진 생활 속의 ‘혼자력’만 믿고 덜컥 베를린으로 떠났다. 베를린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즐겨 읽던 호프만이나 괴테, 헤르만 헤세와 같이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태어난 도시였기 때문이다. 여행의 경험이 적은 나는 생전 처음 가보는 베를린에 대한 공부나 여행 계획을 짜는 대신 그들의 문장을 곱씹으며 때 아닌 낭만에 취해 있었다. 그 탓에 출발에 앞서 내가 간과한 세 가지를 고백해본다.
하나, 나는 심각한 길치다.
둘, 홀로 떠나는 첫 여행(이자 첫 유럽여행)에 들뜬 나머지 길치인 주제에 에어비앤비를 네 군데나 잡아버렸다.(여기에 아래의 이유까지 더해지면서 숙소를 옮길 때마다 험난한 여정이 이어졌다.)
셋, 그런데도 캐리어 두 개를 끌고 인천 국제공항에 들어서는 호기로움을 보였다. (손은 두 개인데 모두 캐리어에게 내어주면 구글맵은 어떻게 확인하려고?)
아니나 다를까, 베를린 테겔 국제공항(Berlin Tegel Airport)에 도착한 나는 기내용 캐리어의 손잡이를 쥐고선 컨베이어 벨트가 토해낸 익숙한 또 하나의 수화물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두 개의 캐리어를 끌고 숙소까지 가야 하는 상황이 실감이 났다.
“아…… (벌써) 망했네.”
베를린 테겔 국제공항에서 첫 번째 에어비앤비가 위치한 슈티글리츠(Steglitz) 구역의 비욘슨스트라세(Björnsonstraße) 거리까지 가기 위해서는 한 번의 버스 탑승과 두 번의 지하철 환승을 통과해야 할 터였다. 설상가상 게이트 너머로는 빗줄기가 쏟아졌다. 그날 밤, 내가 택시에 의존하지 않고 두 개의 캐리어를 끌며 어떻게 에어비앤비에 도착했는지 그 지난한 과정을 다시 복기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마침내 나의 첫 번째 호스트 크리스티안을 마주한 순간만은 평생 잊지 못하리라.
키 높은 나무와 큼직한 전원주택의 윤곽만 간신히 구분할 수 있을 만큼 깜깜한 골목, 아치형 현관문의 벨을 누르고선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기다리던 십여 초. 온몸의 근육이 너덜너덜한데 심장만은 지칠 줄 모르고 터져나갈 기세로 뛰었더랬다. 마침내 문을 열어주는 청년 크리스티안의 입에서 “헤니(Henny)?”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눈물이 찔끔 나왔던 그 밤. 그의 등 뒤로 새어 나오는 엷은 주황 불빛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꼭 나를 구원하러 온 천사 같았다. 내가 머물 2층 방으로 안내해주려는 찰나, 천사는 말했다.
“오, 너 캐리어를 두 개나 들고 왔구나.”
25인치 캐리어를 들고 좁은 계단을 오르는 천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남은 에어비앤비는 어땠더라? 전원주택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럼 다행 아니야? 아니지! 혹시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이면 어떡하려고? 층수가 낮은 애매한 건물이면 왠지 그럴 것도 같은데…. 이 멍청아, 그런 것도 안 알아보고 예약했어? 캐리어를 두 개나 쌌냐고!’ 캐리어는 천사가 들기에도 좀 무거웠는지, 장난 섞인 한숨을 뱉더니 내게 구릿빛 열쇠와 굿나잇 인사를 남기고는 사라졌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에메랄드 색으로 칠해진 벽지 위로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불을 켜고 침대 위 창문의 커튼을 젖혔다. 제법 큰 창 너머로 희미하게 반짝이는 동네가 내려다보였다. '내일은 저 길부터 걸어볼까.'
덩그러니 서 있는 캐리어를 차례대로 바닥에 눕히고 나도 낯선 침대 위에 누웠다. 깊은 피로가 밀려왔지만 쉬이 잠들지 못했다. 그저 얼마간 이렇게 되뇌었던 것 같다.
'오늘은 여행으로 치지 말자. 여행은 내일부터야. 내일은 꽤 괜찮은 하루가 될 거야.'
고백하자면, 베를린에서의 괜찮은 하루는 한 손에 겨우 꼽는다. 두 달을 고집스레 베를린에만 머물면서 내가 몰랐던 나를 너무 자주 발견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누구보다 혼자가 익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단지 군중 속의 고독을 즐기는 수준에 불과했다는 것을 이 여행을 통해 혹독히 깨달았다. 오롯이 혼자를 보는 혼자의 심정은 조금도 유쾌하지 않았다. 숙소를 옮길 때마다 감당해야 하는 혼자의 그림자는 또 얼마나 무거웠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외로움 사이사이 찾아온 몇몇 순간들 덕분이었다. 혼자의 무게를 덜어준 고마움을 말하자면 호스트의 아빠인 헬무트 할아버지의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날은 부활절이었다. 불교신자인 나는 유럽에서의 부활절 휴일이 주는 고요함과 무료함을 이겨내고자 단장을 하고 스타벅스에나 갈 요량이었다. 그런데 아침을 먹으러 부엌으로 내려온 내게 헬무트 할아버지가 모처럼 날이 좋으니 함께 자전거를 타면서 이 동네를 한 번 구경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하는 게 아닌가. 평소 집 안의 모두와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지내던 내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샘솟았는지 몰라도 나는 냉큼 커다란 자전거에 올라탔고, 300년도 더 되었다는 독일의 목장이 있는 달렘도르프(Dahlem-Dorf)를 향해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우리는 서로의 속도에 맞추려고(나는 더 빠르게, 그는 더 느리게) 애쓰다가 결국 각자의 방식으로 달리는 것을 택했다.
베를린 남서지역 내에서도 유독 목가적인 분위기인 달렘도르프에 다다르자 이윽고 주택가 틈에서 별안간 드넓은 초원이 바다처럼 펼쳐지는 진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시종일관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헬무트 할아버지가 기어이 마법이라도 부린 걸까. 나는 도무지 감탄을 아끼지 못했다. 삶을 달리 살아보겠다고 호기롭게 베를린으로 떠나오면서 내가 기대했던 것은 어쩌면 바로 이런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그 옛날 왕에게 바칠 각종 곡물과 채소를 저장하고 유제품을 생산했다던 목장은 과거의 영광 대신 온화한 얼굴만이 남아있었다. 근처에는 농업 박물관을 필두로 수공예 공방과 아이들의 체험학습 공간도 소담하게 이어져 있는데, 날이 날인만큼 가족단위의 방문객들 일색이었다. 나도 헬무트 할아버지와 함께였으므로 조금 으쓱한 기분으로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그가 흰 울타리에 기대어 통화하는 사이 신바람이 난 사람처럼 먼 곳까지 내달리기도 했다. 너무 멀리 왔나 싶을 때쯤 뒤를 돌아보니 헬무트 할아버지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옆에 있을 때는 꼭 나무처럼 커다랬는데, 어느새 자그매진 그와 나란히 서 있는 모형 같은 자전거 두 대를 보며 아주 오랜만에 깊은 다정을 느꼈다.
그때 우린 서로에게 손을 흔들었던가? 흐릿한 기억 속에서 나는 어린 손녀의 심정으로 그에게 손을 흔들어본다.
평소보다 느리게 흘러가는 하루였다. 산책을 마친 우리는 때마침 내리는 비를 피해 근처 펍에서 맥주와 스프라이트를 섞은 믹스 비에르(Mix Bier)를 마시며 부족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작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매일 일기를 쓰고 있다는 것. 나는 반가운 나머지 언젠가 내 이름으로 된 책을 쓰고 싶다고,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지 못한 소망을 짧은 영어로 열심히도 설명했다. 대부분의 고백이 그러하듯 후련함은 짧고 이내 쑥스러움은 찾아왔지만, 헬무트 할아버지는 알겠다는 표정으로 타이밍 좋게 잔을 부딪쳐왔다.
한 번 입 밖으로 꺼낸 말에는 어떤 힘이 실리는 것 같다. 한국에서 돌아온 뒤 나는 베를린 여행기가 담긴 독립출판물을 제작했고, 요즘은 새 출판물을 위해 10년 동안 써온 일기를 거름 삼아 원고를 준비하고 있다. 열여덟. 나 자신조차도 미래에 무엇이 되어 있으리라 상상할 수 없던 시절부터 써 내려간 일기로 출판의 기회를 얻게 되었을 때, 불쑥 헬무트 할아버지가 떠올랐더랬다.
꼬박 한 달을 머문 그의 집을 떠나는 날, 그는 내게 일기장 꾸러미를 건넸다. 알고 보니 (나의 얄팍한 해석에 기대어보면) 그의 집안은 대대로 일기를 써온 이력이 있었고, 실제로 제본까지 해서 (말하자면 독립출판 형태로) 간직하고 있던 것이다. 그중 몇 권이 내게 작별 선물로 전해진 것을 이제와 어떤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면 너무 비약일까?
당시로써는 안 그래도 한 짐인 캐리어에 묵직한 책까지 더해지는 게 짜증스럽기도 했다. 영영 해석할 수 없는 독일인의 일기장처럼, 다시는 돌아올 리 없는 스티글리츠를 떠나야 하는 게 억울하고 무서워서 눈물이 찔끔 날 뻔도 했다. 이제야 겨우 숙소로 돌아오는 풍경에, 이 동네를 지나가는 버스 번호와 지하철 노선에 익숙해졌는데 또 다른 처음과 마주해야 하다니.
다행히 나의 두 번째 에어비앤비가 자리한 프리드리히샤인(Friedrichshain)으로 가는 길은 처음 스티글리츠를 찾아가던 밤처럼 고되지 않았다. 두 개의 캐리어에 손이 묶인 탓에 열 발자국을 뗄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지도를 확인하는 수고로움은 계속되었지만, 확실히 한 달 전의 나와 비교해보면 낯선 곳에서의 스스로를 조금 더 믿고 있었다. 여행도 삶도, 결코 틀린 연습은 없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아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덕분에 조금 더 마음을 열고 프리드리히샤인을 두드릴 수 있었다. 마침 그곳에는 외동으로 자라온 내게 열흘 동안 푸근한 큰언니가 되어준 호스트 헬가가 있었다. 온종일 홀로 베를린을 배회하다 돌아와도 숙소에서만큼은 그녀와 다정히 하루를 공유하는 저녁이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같이 감자를 삶고 커피를 내려주던 헬가와의 시간을 말하려면 다시 한참의 추억이 더 필요할 테다. 내가 그 여행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써 말이다.
호스트 헬무트 할아버지와 헬가가 건네준 온기는 혼자라면 모르고 지나쳤을 베를린을 선물해주었지만, 그것만으로 이 여행의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다. 우리의 일상이 매일 특별한 순간으로 채워지지 않는 것처럼 나의 베를린 여행은 대개 평범한 하루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까닭 없는 무료는 여행 중에도 찾아왔고, 결국 혼자서 감내해야 하는 시시콜콜한 시간 속에서 나는 일상을 돌보는 훈련을 한 것만 같다. 이를테면 이런 방식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 않은 날이지만 냉장고에 남아있는 내 식재료들을 가늠하며 다시 돌아올 일주일치의 장을 보러 나가면서. 이 도시의 쌀쌀맞고 변덕스러운 날씨에 익숙해져 우산을 챙기기보다는 두꺼운 후드를 뒤집어쓰면서. 그리하여 마주하는 생생한 거리의 풍경─퇴근길 도로 위에 늘어선 차량들, 빈 유모차를 미는 허리 굽은 할머니(사람 사는 모습은 다 똑같다.), 제멋대로 구는 아이를 부르는 엄마의 높아지는 목소리, 고심하며 장을 보는 사람, 손을 잡고 무단횡단을 하는 연인의 뒷모습 등─에 위로받으면서. 나도 그 틈으로 스며들 힘을 얻었다. 그리고 확신했던 것 같다. 살아보는 여행이 지닌 환상은 조금씩 희미해져가고 있지만, 이 여행의 끝에 다시금 마주하게 될 평범한 일상은 예전보다 조금 더 생생할 것이 분명하다고 말이다.
2017년 이른 봄, 돌이켜보면 그해 계절은 베를린의 방식대로 참 다정했다. 지난 여행은 나로 하여금 현실에 두 발을 단단하게 붙이고 살아가게 해 준 긴 수업이었던 셈이다. 살아보는 여행을 해본 자들은 결국 일상을 여행하는 법을 터득하고 돌아오는 걸까? 이제 나는 삶이 시시해서 달아나버리는 여행이 아니라, 보통의 나날을 더 잘 살아보고 싶을 때 비로소 여행을 그리워하게 될 것 같다. 내게 또 하나의 일상을 선물해줬던 그 베를린 여행을 생각하면서.
일상을 관찰하고 드물게 소설을 씁니다.
프리랜서 인터뷰어로 글밥을 먹고 삽니다.
열일곱부터 서른이 된 지금까지 매일 일기를 씁니다.
당신에게 나는, 어쩌면 더 읽고 싶은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인스타그램 _ @y_sunsil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