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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어비앤비 Aug 30. 2019

혼자 떠나 유럽에서 보낸 안식월

열린 마음이 이끈 외롭지 않은 홀로서기

▲인천 국제공항

혼자 탄 비행기, 같이 하는 여행


전 직장에는 3년을 근속하면 한 달의 유급휴가를 주는 안식월 제도가 있다. 모두가 아는 것이다. 3년쯤 일하면 안식이 필요하다는 걸. 안식월을 쓴 사람들은 가깝든 멀든 긴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푹 쉬었다. 말 그대로 안식을 취하고 돌아온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한 달간 일을 하지 않아도 월급이 나온다니. 여행을 하기에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다. 가장 멀리까지 가보기로 했다. 파리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고 런던을 지나 아이슬란드까지 가는 여행 루트를 짰다. 


새 카메라도 샀다. 문득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은 여행이 끝나고 한참 뒤에야 열어보게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걸 SNS에 올리면 친구들은 “너 지금 여행 중이야?”라고 묻곤 했다. 내가 여행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사진을 보고 경험을 나눌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매일의 유럽의 경험을 사진과 글로 담아 출근 전 메일로 보내주는 '데일리 유럽'이라는 뉴스레터 서비스를 생각해냈다.


여행은 큰 틀만 짜두고 독자들이 가보고 싶은 곳, 여행지에 대해 궁금한 점에 답하면서 디테일한 여행 내용을 채워가는 것이다. 먼저 프로젝트 설명이 담긴 구독 신청 페이지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구독을 결정하는 데 참고할 만한 사진과 글도 실었다. 가격은 3천 원. 긴가민가하는 사람도 속는 셈 치고 구독해볼 수 있도록 저렴하게 책정했다. 여행 일주일 전, 구독신청 페이지 링크를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기대했던 것보다 많은 구독자가 모였다. 그렇게 109명의 구독자와 함께 여행을 시작했다.


뉴스레터 구독신청 페이지



▲파리에서 묵었던 에어비앤비 근처의 식당



파리의 일상을 공유하는 법


첫 번째 여행지는 파리. 이번 여행의 콘셉트가 관광지가 아닌 유럽의 일상을 느껴보는 것인 만큼 숙소도 관광지에서 떨어진 곳의 에어비앤비로 잡았다. 에펠탑까지 40분이나 걸렸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다. 조용한 주거지역인 파리 17구는 주변 풍경과 음식점에서 현지 느낌이 물씬 났다. 덕분에 반려견과 산책을 즐기는 동네 할머니와 인사도 나누고, 호스트가 추천한 숙소 근처 블랑제리 메종 줄리엔(boulangerie Masion Julien)에서 맛있는 빵도 먹었다. 메종 줄리엔은 파리 전역에 분점이 있는 유명한 빵집이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거의 매일 아침을 이곳에서 해결했다. 혼자라 여러 종류의 빵을 먹어보지 못하는 것이 유일하게 남은 아쉬움이다.


▲에어비앤비 호스트의 반려묘 제임스

무엇보다 즐거웠던 것은 반려묘 제임스(James)와 반려견 레옹(Leon)과의 만남. 제임스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내 방 앞에서 염탐을 하거나 소파에 앉아 나를 감시했고, 레옹은 내가 빵을 먹을 때마다 옆에 앉아 초롱초롱한 눈으로 몇 조각 얻어먹곤 했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레옹과는 거의 형제처럼 지냈는데, 체크아웃하는 날 내가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나오자 떠나는 걸 눈치챘는지 슬프게 울었다. 호스트의 허락을 받아 제임스와 레옹의 사진을 찍어 109명의 랜선 집사들에게도 보내줬다. 

▲에어비앤비 호스트의 반려견 레옹


▲니스에서 묵었던 에어비앤비의 테라스에서 본 풍경

일상을 공유하는 느낌이 들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호스트의 취향에 맞춰 꾸며놓은 방이었다. 깔끔하고 인테리어의 파리 아파트는 세일즈 마케터인 호스트의 실용적이고 심플한 취향이 그대로 드러났다. 파리뿐만 아니라 작은 테라스에 잎이 넓은 식물과 선베드가 있었던 니스, 스칸디나비안 스타일로 꾸며진 아이슬란드의 에어비앤비까지. 호텔이었다면 아마도 세 배가 넘는 숙박비를 지불해야 했을 숙소였다. 나는 게스트에게 허락된 만큼의 공간을 열심히 사진으로 담았다. 

▲아이슬란드에서 묵었던  에어비앤비의 침대



파리와 런던의 거리 풍경이 달라진 이유


일상을 여행한다는 것은 모험의 연속이다. 일정이란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고, 때로는 동전을 던져 방향을 정하거나 막다른 골목이 나오는 일에도 너그러이 시간을 써야 한다. 잘 짜인 계획을 포기하는 모험이 여행지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할지도 모른다. 그런 시각이 도시의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킥보드가 바꾼 파리의 풍경처럼.


파리 숙소에서 개선문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니 광장이 나왔고 근처에 학교들이 보였다. 활기찬 분위기의 거리를 한참 걷다 보니 이질적인 풍경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전동 킥보드였다. 개인이 소유한 게 아니라 공유하는 방식의 교통수단. 서울시의 따릉이와 비슷하지만 정부나 시에서 만든 것은 아니었다. 요즘은 서울에도 보이는 공유 킥보드다. 미국에서 시작된 공유 전동 킥보드 열풍은 찬반 논쟁이 첨예한 이슈다. 편리한 새 교통수단의 등장이라며 반기는 사람도 있지만, 안전사고 위험이 크고 거치대 없이 길바닥에 두고 가는 반납 방식이 거리의 미관을 해친다는 의견도 있다. 

▲파리의 전동 킥보드와 자전거

헨젤과 그레텔이 빵조각을 따라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듯, 숙소 근처에서부터 이 버려진(반납된) 전동 킥보드를 따라 걸어보기로 했다. 킥보드가 없는 풍경을 찍기 위해서였다. 걷다 보니 샹젤리제 거리가 나왔고, 30분간 끊임없이 킥보드가 길에 놓여있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버려진 전동 킥보드를 따라 걷는 여정은 장장 네 시간에 걸쳐 이어졌고, 샹젤리제 거리-에펠탑-파리 16구-개선문에 이르는 파리 서쪽 관광을 겸하게 됐다. 교통체증이 심한 파리 같은 대도시에서는 충분히 환영받을만한 교통수단인 것 같았다. 하지만 파리를 여행하며 거리 사진을 찍는 입장에선 반갑지 않은 변화였다. 클래식한 풍경이 매력인 파리에 인도를 쌩쌩 달리는 전동 킥보드가 줄지어 있는 것이 썩 보기 좋은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파리의 16구는 주거지역과 갤러리, 고급스러운 상점가들이 모여있는 부촌이다. ‘파리의 강남’이라고도 불린다. 샹젤리제, 에펠탑, 개선문처럼 유명한 관광지와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지어진지 100년이 넘은 클래식한 외관의 아파트 바로 옆에 최신식 쇼핑센터가 묘하게 어울리는 모습으로 들어서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유명 관광지에선 이질적으로 느껴지던 전동 킥보드도 이곳 풍경에는 꽤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 같았다. 어쨌든 네 시간의 도보여행에서 킥보드가 없는 거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쩌면 전동 킥보드가 없는 대도시의 모습은 기억 속에나 존재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전동 킥보드가 없는 런던의 풍경

프랑스 여행을 마치고 런던(London)에 갔을 때, 바로 그 예측이 깨졌다. 유럽 전역에 퍼진 전동 킥보드 열풍이 유일하게 점령하지 못한 곳이 바로 런던이었다. 런던에서도 도보여행을 했지만, 전동 킥보드를 단 한 대도 보지 못했다. 의아했다. 교통체증이 심하고 도로도 파리보다 넓은데 왜? 런던 교통부가 법으로 규제를 한 것이다. 파리에선 전동 킥보드가 활보하던 인도는 깔끔했고, 엄청나게 많은 자전거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분명 비슷한 역할을 하는 두 이동수단이었지만, 풍경을 담는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다르게 느껴졌다. 


마천루가 빼곡히 들어선 업무지구에선 상관이 없었지만, 런던의 중심부인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 같은 오래된 동네에는 역시 자전거가 어울렸다. 정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풍경을 마주할 때 느껴지는 감정이 달랐다. 사진에 담긴 파리와 런던의 거리 풍경이 묘하게 다른 이유다. 



가볍게 열린 마음이 데려다주는 곳


런던으로 가기 전, 프랑스 남부를 여행했다. 파리에서 마르세유(Marseille)를 지나 니스(Nice)로 가는 일정. 마르세유에서는 이틀을 머물렀는데, 뉴스레터 구독자들의 의견에 따라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 당일치기 여행을 하기로 했다. 마르세유에 도착한 다음 날, 점심을 먹고 생 샤를(Saint Charles) 역에서 엑상프로방스로 가는 기차를 탔다. 그런데 티켓에 좌석이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약간 멈칫하다 자리에서 맥 너겟을 먹고 있는 남자에게 좌석을 어떻게 찾는지 물었다. "정해진 좌석이 없으니 편하게 앉으면 돼요." 나는 심심하기도 고맙기도 해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마르세유 기차역

그는 공대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인 말릭(Malik)이었다. 남동부의 툴롱(Toulon)이라는 도시에 사는데 여자 친구를 만나러 주말마다 엑상프로방스에 올라온다고. 말릭과는 대화가 잘 통했다. 기차를 타는 1시간 동안 쉼 없이 프랑스 언론이 난민을 대하는 태도라든지, 서로 다른 문화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 같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의 '데일리 유럽'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말했고, 말릭은 흔쾌히 출연 의사를 밝혔다. 


엑상프로방스는 한산했다. 대학을 중심으로 이뤄진 상권이라 일요일엔 문을 닫은 곳도 많았지만 말릭은 여자 친구와 그 어머니를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여유가 있다며 원한다면 같이 주변을 산책할 수 있다고 했다. 다시 꽤 오랜 시간을 대화를 나눴다 성당 앞을 지날 땐 종교의 교리와 현실에서의 적용 대한 얘기를 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소나기가 내렸고, 근처 펍에 들어가 맥주도 마셨다. 이쯤 되니 오늘 하루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게 좋겠다 싶었다.


비가 그치기 전에 말릭의 여자 친구 샬롯(Charlotte)과 어머니가 합석했다. 맥주 한잔을 더 마시고 저녁을 먹으러 일어날 요량으로 근처에 맛있는 음식점을 소개해달라고 했더니 다들 난색을 표했다. 이곳 음식이 대체로 비싸고 맛이 별로라며 샬롯이 본인 자취방에서 다 같이 저녁을 먹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렇게 그날 저녁은 샬롯의 룸메이트 마고(Margot)까지 네 명이서 먹게 됐다. 

▲샬롯의 집에서 함께한 저녁식사

1시간 남짓 즐겁게 저녁을 먹고, 나는 마르세유로 가는 막차시간에 맞춰 일어났다. 오늘 아침, 엑상프로방스행 기차를 탈 때만 해도 돌아오는 시간 외엔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어쩌면 시간이 비어있다는 건 마음이 열려있다는 것과 같은 뜻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열린 마음은 우리를 새로운 곳에 데려다 놓기도 한다는 사실을 또 한 번 느꼈다. 계획해서는 절대 갈 수 없는 곳으로.



유명한 동네의 특별한 공간으로


물론 일상을 공유하기 위해 길거리를 돌아다니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여행 책자에 나오지 않는 특별한 공간도 찾아 나섰다. 종지 잡지와 사진집을 좋아하는 내가 꼭 방문하고 싶었던 곳들이기도 하다. 

▲오프르 파리의 유리벽

파리 마레 지구에 위치한 서점 겸 갤러리이자, 공연 무대인 오프르 파리(0fr. Paris)에 대해서는 어라운드 매거진의 기사를 통해서 처음 접하게 됐다. 인터뷰에서 자신이 만든 잡지 배포할 곳을 마련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 어떻게 하다 보니 20년이나 하게 되었다는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는 동안 자신은 경력이 30년이나 되는 제작자가 되었고, 이것이 큰 비즈니스로 성장하면서 수익도 제법 생겼다는 것이다. 


가난한 콘텐츠 제작자가 기존의 플랫폼에 따르지 않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 걸로 먹고살자는 생각.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가내수공업은 시간이 지날수록 능숙해지는 독특함을 가지게 된다. 당장 먹고사는 것이 빠듯한 사람에겐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프르 파리를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날 비디의 진열대

카날 비디(CANAL BD)는 파리 퐁피두 센터 근처에 있는 슈퍼 히어로 전문 서점이다. 퐁피두 센터에서 관람을 마치고 뉴스레터를 쓸 카페를 찾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처음엔 그림책 서점인가 싶어 지나칠 뻔했지만, 들여다보니 멋진 콘셉트의 공간이어서 얼른 들어갔다. 무엇보다 '전문 서점을 열 정도로 슈퍼히어로가 많은가?' 궁금했다. 서점 내부는 정말 슈퍼히어로 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음반 매장에서 음반을 장르나 가수 별로 구분하는 것처럼. 


세상에 이렇게 슈퍼히어로가 많았다니. 헌책방처럼 책이 쌓여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체계적으로 정리된 모습이었다. 일반인들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덕후들만의 경지가 아닐까. 각 책에는 추천 문구 같은 것이 붙어 있다. 새로 연구할 슈퍼히어로를 찾기 위해 방문한 사람에게 좋을 듯했다. 덕질하며 쌓아온 세월의 깊이가 주는 바이브가 느껴지는 공간. 수익이 얼마나 나는지 궁금해졌다. '이렇게 된 이상 덕후끼리라도 행복하자'라는 전략은 앞으로도 유효할 것 같다.

▲모노클 숍 입구

런던의 모노클 숍(Monocle shop)과 카페도 특별한 공간이었다. 종이 잡지의 성공 사례를 얘기할 때 가장 첫 번째로 등장하는 이름인 모노클은 런던에서 시작된 글로벌 매거진이다. 작은 하나의 타깃만을 공략해 종이 매거진으로서 성장한 뒤 라디오와 오프라인 숍까지 열며 하나의 브랜드가 됐다. 모노클 샵에는 다른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 형태로 만든 물건들이 대부분이었다. 모노클이라는 미디어 브랜드가 가진 고급스러운 안목을 파는 곳. 어찌 보면 요즘 유행하는 미디어 커머스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형태가 되는 것이다. 모노클 카페에서 커피와 함께 나오는 초콜릿의 뒷면에는 "모노클을 구독하고 샤프해지세요"라고 적혀있었다. 디테일한 문구까지 카페를 매거진 마케팅의 공간으로 사용하는 멋짐이 돋보였다.

▲포토 그래퍼스 갤러리가 있는 소호 거리

포토그래퍼스 갤러리(The Photographers’ Gallery;TPG)는 런던 소호에서 가장 애정 하는 공간이다. 사진 애호가들 사이에선 꽤 유명한 갤러리로 지하엔 사진집과 필름, 엽서 등을 파는 샵이 있다. 이 곳을 방문했을 때 오래전부터 사고 싶었던 사진집을 발견해 얼른 집어 들었다. 독특한 색감을 내는 필름들도 많아 필름 카메라를 쓰는 사람이라면 꼭 들러볼 만하다. 3층에선 서로의 사진을 보고 피드백하는 세션이 진행 중이었고, 나머지 층은 3개월마다 바뀌는 기획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1층 카페에는 카메라를 하나씩 든 여행객들이 각자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을 돌아보며 쉬고 있는데, 그 풍경이 기분 좋게 여유로웠다. 나도 그 속에 녹아들어 한참이나 시간을 보냈다.



아이슬란드 사람처럼 여행하는 법


파리, 프랑스 남부, 런던을 지나 아이슬란드에 도착했다.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Reykjavík)에선 투어를 신청했다. 멋진 자연경관과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다. 아침에 일어나니 비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골든 서클(절벽&폭포) 투어를, 밤 9시부터는 오로라 투어를 갈 예정이었는데 말이다. 우선 오전 투어를 내일로 미루기 위해 여행사에 전화를 걸었다. 여행사 직원은 오늘도 투어가 진행되지만 원한다면 내일로 날짜를 바꿔줄 수 있다고 했다.

▲아이슬란드 골든 서클 투어 중 마주친 풍경

"네? 오늘도 투어를 한다고요? 이렇게 비바람이 세게 부는데요?"
"아이슬란드 날씨는 원래 이래요. 아마 내일도 크게 다르진 않을 걸요."


거짓말! 어제는 아침에 이렇게 비바람이 불지는 않았다 어쨌든 출발하면서는 비를 맞지 않고 싶은 마음에 투어를 다음날로 미뤘다. 한참을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점심을 먹고 시내로 나서니 조금씩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기념품을 사고 카페에서 차를 마실 생각이었다. 10분 정도 걸어 시내에 도착했고, 또 비가 쏟아졌다. 

▲비가 그치자 빛나기 시작한 코팅된 창문

얼른 카페로 뛰어들어가 차를 한 잔 시키고 창밖을 보니, 카페 반대편 건물의 코팅된 창문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비가 그치고 해가 나는 맑은 날이다. 하늘을 보니 구름이 빠르게 움직이면서 30초마다 다르게 보였다. 바다 위에 다시 먹구름이 모이고 고개를 반대로 돌리면 또 파란 하늘이 열리는 식이었다. 기념품점에서 본 마그넷에 적힌 문구가 떠올랐다.

▲아이슬란드 기념품점의 마그넷

"아이슬란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만약 날씨가 마음에 안 들면, 그냥 5분만 기다리세요..."


아이슬란드의 날씨는 원래 이렇다. '맑은 날'은 없고 '맑은 때'만 있는 곳. 마그넷을 보니 괜히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곳에서는 일기예보가 딱히 중요하지 않다. 조금 기다리면 해가 나고 걷다 보면 다시 비가 내리다 또 해가 나니까. 매일이 이런 식이었다. 이제야 아이슬란드 사람처럼 여행하는 법을 조금 알게 된 것 같았다. 내일 또 비가 오거나 오로라를 못 본다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아이슬란드는 그런 곳이니까. 


일상을 체험하는 여행은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차들이 왼쪽으로 달리는 횡단보도에 서서 평소와는 반대로 고개를 돌려보거나, 밤 9시에 지는 노을에 맞춰 산책을 나가는 일처럼 말이다. 그럴 때면 지금껏 내가 안다고 믿었던 모든 것을 한 번쯤 의심하게 된다. 원래 그렇다고 하는 것들, 처음부터 당연했던 것들에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그렇게 견고했던 생각의 틀에 금이 가는 순간, 우린 조금 더 유연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닐까?



여행에 방법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니까



일상을 여행한다는 것이 꼭 남들과 다르게 움직인다는 것은 아니다. 파리를 여행하는 사람 중 에펠탑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는 사람은 없다.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 아닐까. 처음 보는 소품 가게에 들러본다든가 관광지에서 조금 떨어진 유명하지 않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면 이미 일상을 여행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에펠탑의 야경

결과적으로 [데일리 유럽] 뉴스레터 프로젝트는 성공이었다. 총 30개의 뉴스레터를 빠짐없이 정해진 시간에 보냈다. 구독자들은 뉴스레터 마지막 부분의 참견하기 버튼으로 설문조사 형태의 양식에 자신의 의견을 적었다. 여행기간 동안 109명의 구독자가 361개의 '참견'을 했다. 나는 이 참견에 따라 여행지를 바꾸기도 하고 새로운 음식점을 찾아가기도 했다. 


“마르세유를 더 돌아볼까요? 엑상프로방스로 당일치기를 갈까요?” 참견하기 페이지에 투표 버튼을 만들어 다음날의 여행지를 정했다. “내일 뮤지컬을 보러 가요. 런던 피카디리 서커스 근처에서 점심으로 뭘 먹을까요?” 맛집을 묻는 질문에 달린 “아마 디숨(Dishoom)이라는 인도 음식점이 근처에 있을 거예요. 가격은 좀 있지만 맛집이에요!” 고마운 참견을 따라 한 끼를 해결하는 일도 많았다. 

▲넓은 책상이 있어 글을 쓰고 사진을 편집하기 좋았던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의 에어비앤비

사람들은 매일 아침 메일함을 열어 유럽의 사진을 감상할 수 있었고, 나는 혼자 하는 여행이 외롭지 않았으니 서로에게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시간을 내어 읽는다 생각하니 마음이 선뜻 가벼워지지 않았고, 한편으론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쉬지 않고 쓸 수 있었기도 하다. 밤이 되면 머리를 쥐어뜯으며 ‘오늘은 뭘 쓰지? 내가 이걸 왜 했지?' 자책하고, 아침에 보내오는 구독자들의 칭찬과 격려를 받으며 다시 행복해지길 반복하는 것이었다.

▲니스 해변가의 사람들

뉴스레터를 통해 사진과 글로 취향을 나누고 함께 여행하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새로운 여행법이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으며 여행하는 동안 혼자였다면 그냥 지나쳤을 멋진 공간들을 발견했다. 도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생긴 것도 같았다. 모두들 각자의 방식으로 여행하고 있었고, 나는 그 방식들을 모아서 또 다른 방식으로 여행을 떠난 것이다. 그러니 세상에 같은 여행이란 하나도 없는 게 아닐까? 여행에는 정답이 없으니까.




에어비앤비 작가, 김준용

: 대학내일에서 에디터, 포토그래퍼, 영상 제작자로 일했다. 지금은 SSG.COM의 UX콘텐츠 제작자로 일한다. 성실한 기록자로 살며 해롭지 않은 어른이 되는 게 꿈이다.

- 개인 홈페이지 :  kimjuny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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