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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어비앤비 Oct 11. 2019

꽃 피는 사월, 프라하 한 달 살이

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간 나날


눈의 고장을 떠나, 봄의 프라하로


2019년 3월, 3년간의 일본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일본행을 택했던 표면적인 이유는 일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일종의 도피에 가까웠다. 지난한 도시 생활과 복잡한 관계들로부터 한 발 물러나 잠시 숨을 고르고 싶었다. 긴 여행을 떠나는 심정으로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고, 이후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눈(雪)의 고장에서 3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삶이기도 했고 여행이기도 했던 그 시간은 삶과 여행의 의미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낯설던 공간이 익숙해지고, 새로운 관계가 생겨나고, 그곳에 있는 게 당연하게 느껴질 때쯤 자연히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름지기 여행이란 자신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 때 성립되는 법이니까.

영국의 낭만파 시인 퍼시 비시 셸리는 <서풍의 노래>에서 이렇게 읊었다. "겨울이 오면 봄 또한 멀지 않으리"

길었던 여정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 것인가. 오랜 고심 끝에 새로운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정든 공간과 잘 헤어지기 위해서, 그리고 ‘진짜로’ 시작될 새로운 여정을 준비하기 위해서.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헤어짐이 있으면 새로운 만남이 있다는 걸, 여행을 통해 부러 다시 확인하고 싶었나 보다. 새로운 여행지를 결정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새롭게 떠나갈 곳은 이미 떠나온 곳과는 아주 다른 곳이었으면 했다. 길고 추웠던 겨울을 잊을 수 있을 만큼 봄빛 선연하고, 순백의 설원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다채로운 빛깔로 반짝이는 도시. 눈부신 햇살이 붉은 지붕 위로 다사하게 스며드는 프라하의 사진 한 장이 마음을 사로잡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여행을 간다. 프라하에 간다. 4월 1일부터 30일까지 딱 한 달 동안 간다. 그게 내가 세운 여행 계획의 모두이고 전부였다. 은비는 계획이라고 말하기에도 낯부끄러운 이런 계획을 듣고도 선뜻 여행에 동행하겠다고 나서 준 고마운 친구다. 수년 전 직장 동료로 처음 만나, 지금은 절친한 벗으로 지낸다. 약간의 거리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닮은 우리는, 여정을 함께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여행이 어쨌거나 ‘각자의 여행’이 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한 달 동안 매일 각자 하고 싶은 일을 알아서 하되, 같이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때는 같이 하자고 했다. ‘반드시 함께’가 아닌 ‘따로 또 같이’. 그렇기 때문에 여행 전에 논의해야 할 일이란, 둘이 함께 쓸 숙소를 구하는 일 정도 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프라하로 향했다. 계절은 바야흐로 겨울을 떠나 봄을 향해 가고 있었다.

2019년 4월 눈의 고장을 떠나 봄의 프라하로 향했다



살아보는 여행! 에어비앤비에서의 모든 날, 모든 순간


처음 한 달 살이를 계획할 때부터 숙소는 에어비앤비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장기 숙박을 하기에 공동 시설을 사용해야 하는 호스텔이나 민박은 다소 불편할 것 같았고, 호텔은 비용 면에서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숙소를 결정하기에 앞서, 은비와 나는 서로가 선호하는 공간을 알기 위해 많은 대화를 나눴다. 둘이 함께 쓸 숙소이기 때문에 서로의 취향을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했다. 에어비앤비의 좋은 점은 여행자의 취향을 만족하는 다양한 공간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 점을 십분 활용해 후보를 간추려 나갔다. 우리의 여행은 살아보는 여행을 지향하고 있었고, 따라서 숙소를 구할 때도 그런 지향점이 자연스럽게 반영되었다.
 
우선 한 달이나 함께 지내는 만큼, 두 사람의 독립적인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데 큰 의견이 일치했다. 또 교통 면에서 다소 번거로움이 있더라도, 숙소의 위치는 관광지를 떠나 주거지에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대신 식료품점은 가까워야 했다.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공원도 가깝다면 좋을 것 같았다. 여기에 프리랜서로 일하는 은비는 틈틈이 작업할 수 있는 책상이 있으면 좋겠다는 조건을 덧붙였다. 빛과 소음에 민감한 나는 햇빛이 잘 드는지, 간접 조명은 있는지, 층수가 저층은 아닌지를 따졌다. 두 사람 모두 도시적이고 모던한 분위기보다는 따뜻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공간을 더 선호했다. 그렇게 공유한 취향을 바탕으로 숙소를 물색하던 중에, 두 사람 마음에 쏙 드는 공간을 만났다. 6층짜리 맨션의 꼭대기층에 있는 옥탑으로, 두 개의 독립된 침실과 거실이 있는 아늑한 공간이었다.

사실 이 숙소에서 내 마음에 가장 든 것은, 다름 아닌 하늘을 향해 나 있는 네 개의 창문이었다. 처음 은비가 괜찮은 숙소가 있다며 사진을 보내왔을 때, 프라하의 근사한 저녁놀이 펼쳐진 이 창문을 보고 한눈에 반해버렸다. 여기에서라면 매일 프라하의 아름다운 하늘을 볼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 달 동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하루의 끝에, 그 커다란 창문 아래서 나는 매일 일기를 썼다. 맑은 날과 흐린 날과 바람이 부는 날과 비가 내리는 날, 쪽빛으로 가득했던 동틀 무렵의 하늘과 붉은색 노을이 수채화 물감처럼 번지던 저녁 하늘, 달빛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던 어느 날의 밤하늘은 그렇게 모두, 4 분할된 사진처럼 매일의 일기 속에 한 장 한 장 기록되었다.

서른 날 동안 매일 다른 하늘을 보여준 에어비앤비 숙소(좌)와 창문 아래 은비(우)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어느 날의 하늘
새벽 5시 반쯤 깼다. 카렐교(Charles Bridge)로 일출을 보러 갈까 말까 망설였다. 침대를 벗어나자 숙소의 창밖으로 구름 한 점 없는 쪽빛 하늘이 펼쳐진다. 일출을 보기에 더없이 좋을 것 같은 날씨다. 간단히 세수만 하고, 가져온 옷 중에서 가장 따뜻한 옷을 챙겨 입은 뒤 숙소를 나섰다. 사위는 아직 어두웠고, 공기는 서늘했지만 춥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거리는 인적 없이 고요했고, 주황색 가로등 불빛 사이로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트램 정류장으로 걷는 동안 동녘 하늘이 눈에 띄게 밝아져 왔다. 오늘의 일출 예정 시간은 6시 36분이었고, 22번 트램을 타고 카렐교와 가까운 말로스트란스케 나메스티(Malostranske Namesti)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6시 12분이었다. - 2019년 4월 2일의 일기 中
소원을 빌면 이루어 준다는 카렐교의 일출
일기를 쓰고 난 뒤에 밖으로 나가 본 둥근 달
해 질 녘에 서쪽 하늘보다 동쪽 하늘이 더 예쁘다는 건 프라하에 온 뒤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숙소의 창은 남쪽으로 나 있어서 서쪽과 동쪽 하늘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정승환의 신보를 들으며 일기를 쓰다가, 문득 오늘 하늘이 궁금해 창밖을 내다보니 마침 동쪽 하늘에서 하얀 달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보름이 가까워졌는지 원형에 가깝다. 처음에 프라하에 왔을 때만 하더라도 손톱 달이었는데, 어느새 또 달이 차오른 만큼의 시간이 흘렀구나 싶다. 시간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세간의 이야기에 선뜻 동의할 수 없다. 시간만큼 눈에 잘 보이는 게 또 있을까. - 2019년 4월 18일의 일기 中


여행을 하다 보면 어떤 공간이 특별해지는 순간을 경험한다. 공간 위에 일상이라는 이름의 시간이 덧대어질 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다. 프라하에서 한 달이라는 일상을 보내는 동안, 하늘과 맞닿은 이 작은 옥탑은 우리 두 사람에게 세상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봄꽃 기행의 시작, 트로야성 비밀의 화원


여행하는 동안 은비와 나는 서로의 여행 취향에 대해 자주 농을 치곤 했다. 소싯적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한 경험이 있는 은비는 한 달 동안 주로 산행 위주의 극한 여행을 즐겼고, 나는 주로 정원이나 공원에 핀 꽃들을 찾아다녔기 때문이다. 은비가 핼쑥한 얼굴로 숙소에 돌아올 때마다 나는 왜 굳이 사서 그런 고생을 하느냐고 놀렸고, 은비는 내게 이쯤 되면 이름을 ‘꽃솔’로 개명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놀려댔다. 그럼에도 두 사람 모두 자연을 사랑하는 자연인인 데는 다름이 없어서, 며칠을 그렇게 놀려먹다가도 또 며칠은 둘이서 의좋게 자연을 찾아 떠나곤 했다.

나도 처음부터 꽃만 쫓아다닐 생각은 아니었다. 긴 여행을 하다 보니 저절로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게 되었다. 프라하에 도착한 다음 날, 한낮의 카렐교에 갔다가 인파에 질겁을 하고 돌아온 뒤로, 관광객이 드문 한적한 정원이나 공원을 찾게 된 것이 그 시작이다. 언제부터인가 여행을 하더라도 이름이 잘 알려진 관광지에는 오래 머물지 못하게 됐다. 한 번쯤 보고 경험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유명세를 앓는 곳인 탓에 지쳐서 금방 돌아서 버릴 때가 많다. 또 그런 곳에서 항상 큰 감명을 받고 오느냐고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자연에서 더 나은 감동과 위안을 얻는다.

봄이면 진분홍 벚꽃이 흐드러지는 트로야성의 정원

때마침 우리가 프라하에 머물던 시기는 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춘삼월이었다. 그리하여 봄꽃을 찾아 나서게 된 것이었다. 봄꽃 기행의 시작은 트로야성(Troja Chateau)의 정원이었다. 트로야성은 프라하성(Prague Castle)과 카렐교 등 관광지가 밀집해 있는 구시가지에서 다소 거리가 떨어져 있어, 관광객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장소다. 특히 봄철에 이곳의 벚꽃이 얼마나 흐드러지게 피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듯하다. 나 역시 벚꽃 마니아가 아니었더라면, 끝내 이곳을 알지 못했을지 모른다. 매년 벚꽃 주간이 되면 어디로든 벚꽃이 핀 곳을 찾아가는 게 나만의 연례행사다. 트로야성은 어느 프랑스인 블로거가 올려놓은 짧은 글을 보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었다.

어릴 적 친구들과 함께 동네 뒷산에 올랐다가 우연히 진달래 군락지를 발견한 일이 있다.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발을 내딛던 순간에 펼쳐진 진달래 꽃무리를 보고 꿈인 듯 황홀경에 빠졌던 유년의 기억이, 트로야성의 벚꽃을 보는 순간 되살아났다. 그야말로 비밀의 화원을 찾은 느낌이었다. 만발한 진분홍 벚꽃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벚꽃 피는 계절에 만났던 그리운 인연들이 떠올랐다. 동시에 지금도 산 중턱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동행인이 생각났다. 그래서 다음 날에는 은비를 데리고 다시 갔다. 어제와 다름없이 아름다운 꽃그늘 아래서 두 사람 모두 한껏 달뜬 채로 얼마간의 시간을 보냈다. 은비는 이날 ‘꽃에 취했다’는 표현을 썼다.

벚나무 아래 드리워진 꽃그늘
내가 찍은 은비(좌)와 은비가 찍은 나(우)
누군가의 쉼이 되어줄 벤치 하나, 그리고 창문에 핀 벚꽃

벚꽃. ‘찰나’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꽃. 프라하에서 보낸 순간도, 언젠가는 우리가 보았던 찰나의 벚꽃처럼 기억될 것이다.


트로야성 정보
- 주소: U Trojského zámku 4/1, 171 00 Praha 7, Czechia
- 운영시간: 화~일요일 10:00~18:00, 금 13:00~18:00, 정원은 19시까지(11월~3월 미개방)
- 입장료: 정원 무료, 성 내부 120CZK
- 웹사이트: ghmp.cz/zamek-troja




꽃바람이 불어오는 곳, 프라하성 아래 궁전 정원


프라하성은 카렐교와 더불어 프라하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다. 그런데 카렐교에 다녀온 뒤로 프라하성에는 영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으로 북적일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프라하성은 언제나 저기 저렇게 빛나고 있을 테니까 꼭 지금 가보지 않더라도 괜찮을 거라고, 어쩌면 이대로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게 더욱 아름답게 기억될지 모른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렇게 프라하성을 망설이는 동안에도 시간은 착실히 흘렀다. 여정은 어느덧 절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프라하성에 가봐야겠다는 마음이 든 건 그즈음이었다. 정확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첨탑이 무너져 내렸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뒤였다. 언제까지나 거기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사실, 왜 그 당연한 사실을 항상 잊으며 사는 걸까. 그런 반성을 하며 막 프라하성을 보고 내려오던 참이었다.

그 무렵의 나는 프라하의 구시가지 지리를 어느 정도 익힐 수 있게 되어서, 급한 일이 없으면 지도 앱을 켜지 않고 발길이 닿는 대로 걸어 다녔다. 프라하성 아래 궁전 정원도 그렇게 되는 대로 걷던 중에 우연히 발견한 곳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돌린 시선의 끝에 웬 보라색 꽃나무 하나가 걸렸다. ‘꽃 레이더’가 본능적으로 작동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꽃나무가 있는 ‘비탈’이 어쩐지 좀 이상했다. 건물은 아니고, 성벽도 아니고, 단순한 비탈도 아닌 듯한 저곳은 대체 뭔가. 나는 무엇에 홀린 듯이 그쪽으로 다가섰다. 가까이 다가서자, 체코어와 함께 영문으로 적힌 안내판이 보였다. ‘프라하성 아래 정원(Gardens below Prague Castle)’.

올라갈 때의 풍경과 내려올 때의 풍경이 다른 테라스식 궁전 정원
한때는 서로 다른 정원이었고 지금은 하나가 된 정원의 모습들

놀랍게도 그곳은 정원이었다. 후에 숙소에 돌아와 찾아본 바로는 중세 때까지 포도밭을 일구던 곳으로, 16세기에 접어들어 귀족들이 궁전을 지으면서 정원으로 변한 곳이라 한다. 독특한 점은 정원이 비탈에 조성돼, 드물게 테라스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제야 나는 내가 본 기이한 ‘비탈’의 정체를 깨달았다. 정원은 한적했다. 프라하의 몇몇 정원이 입장료를 받지 않는 데 반해 소정의 입장료가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저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 건지 정원 내에 관람객이라곤 나와 모자 관계로 보이는 두 사람이 전부였다. 프라하성을 돌아보는 동안 한껏 상기되었던 마음이 저절로 차분해졌다.


눈앞에 놓인 계단을 따라, 느릿느릿 정원의 층을 올랐다. 한 층 한 층 오를 때마다, 각기 다른 정원의 모습이 펼쳐졌다. 본래 5개로 되어 있었던 것을 하나로 연결시킨 정원이어서 보통의 정원보다 조악한 느낌은 있었지만, 닮은 듯 다른 정원의 모습을 살펴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오를 수 있는 한 가장 높은 층에 이르렀을 때, 나는 비로소 하나로 완성된 정원의 모습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탈이 진 쪽으로 붉은 지붕의 프라하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프라하의 전경은 흡사 정원의 일부 같았다. 그렇게 비현실적인 풍경의 프라하를 내려다보며, 층계를 오르는 사이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치고 있을 때였다. 익숙한 꽃 내음이 바람을 타고 코끝으로 날아들었다. 내 시선을 잡아끈, 그러니까 나를 이 정원으로 초대한 꽃은 꽃 때를 맞이한 라일락이었다.

라일락 나무 옆에 놓인 벤치에 앉아, 가만 불어오는 꽃바람을 맞았다. 귓가에서는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라일락 꽃바람이 불어오던 벤치에 앉아 바라본 풍경
프라하성 아래 정원 정보
- 주소: Valdštejnská 158/14, 110 00 Malá Strana, Czechia
- 운영시간: 4월, 10월  10:00~18:00, 5~9월 10:00~19:00(11월~3월 미개방)
- 입장료: 80 CZK
- 웹사이트: www.palacove-zahrady.cz/en






오래 보아야 더 아름다운 풀꽃처럼, 디보카 샤르카 자연공원


프라하를 다녀온 사람 중에 디보카 샤르카(Divoká Šárka) 자연공원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디보카 샤르카를 지나치지 않은 사람 역시 많지 않을 것이다. 프라하 바츨라프 하벨 공항(Václav Havel Airport Prague)과 인접해 있기 때문이다. 공항에서 빠져나와 시가지로 향할 때, 좌측 차창 밖으로 드넓은 초원처럼 펼쳐지는 곳이 바로 디보카 샤르카다. 체코의 국립공원이자, 자연보호 구역인 디보카 샤르카에는 울창한 숲과 초원, 구릉과 호수, 그리고 자연적으로 피어난 풀꽃과 꽃나무들이 있다. 지저귀는 새소리와 흐르는 물소리, 몸체를 낮춰 상공을 가로지르는 비행기 풍경도 덤으로 따라온다. 디보카 샤르카를 찾은 건, 여행 후반에 접어들고 있을 때였다. 이미 도심 속 정원과 공원은 대부분 둘러본 터라, 내심 좀 더 날것의 자연을 찾고 싶었던가 보다.

디보카 샤르카에 도착했을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나는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아침형 인간이다). 20번 트램을 타고 디보카 샤르카 정류장에서 내리자, 멀리 초록이 보였다. 싱그러운 초록의 위로는 맑은 파랑이 펼쳐져 있었다. 그 초록과 파랑을 눈에 담으면서 목적지로 향했다. 숲과 하늘의 경계가 선명한 날이었다. 입구에 도착하니 공원의 안내도가 보였다. 그런데 영문 표기가 병기된 유명 관광지의 안내판과 달리, 디보카 샤르카의 안내판은 체코어로 된 것뿐이었다.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적당한 크기의 도심 속 공원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디보카 샤르카는 축구장 25개 크기의 광활한 면적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길눈이 어두운 내가 공원을 무사히 둘러보고 나가려면 무언가 이정표가 필요했다. 이정표는 당연하게도 꽃나무가 되었다.

초록과 파랑의 경계가 선명했던 날 디보카 샤르카의 초원과 꽃길

공원 초입에서 멀지 않은 하얀색 꽃나무 군락을 이정표 삼아, 꽃나무 사이로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하얀 꽃은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벚꽃의 일종인 듯했다. 길은 걷는 새 점점 오르막이 되어갔다. 아무래도 이제껏 내가 지나온 길이 구릉인 모양이었다. 이 참에 공원 전체를 조망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내친김에 그대로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그 길을 걷는 사람은 나뿐이어서, 약간은 설레고 약간은 두려웠다. 그렇게 무사히 구릉의 정상까지 올라섰을 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고 하마터면 눈물을 왈칵 쏟을 뻔했다. 여행지에서 마주하는 많은 순간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바로 이런 순간 아닐까. 오래 걸어온 길의 끝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감동을 마주하는 순간.

디보카 샤르카의 이름 모를 구릉 위에서 바라본 꽃 풍경

구릉의 아래로는 꽃나무와 호수의 물줄기가, 구릉 정상의 평원에는 거기서 자연히 나고 자란 무수한 풀꽃들이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햇빛과 빗물과 흙과 바람을 자양분 삼아 스스로 움튼 자연의 생명들. 긴 겨울을 견디고 꽃을 피운 봄의 정령들.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은 게 없었다. 그날 디보카 샤르카의 이름 모를 구릉 정상에서 만난 풍경은, 적어도 내게는 세상에 태어난 모든 풀꽃을 위한 찬가처럼 느껴졌다.

자세히 볼수록 아름다운 풀꽃들



꽃을 사랑하는 마음, 그러므로 사랑하는 마음


사실 이번 여행에서 붙은 별명이 하나 있다. 일명 ‘묘지 마니아’다. 여행 중에 본의 아니게 묘지를 많이 다녀서 그렇다. 평소에 오컬트에 취향이 있다거나, 호러물을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다. 귀신이라면 질색을 하고 싫어한다. 프라하를 비롯한 유럽 각 도시의 묘지는 여러 면에서 흥미롭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 깊은 점은 공동묘지가 대부분 도심 한가운데 있다는 점이다. 생(生)과 사(死)를 분리해 바라보지 않고, 생의 한가운데 죽음을 가까이 두었다는 점이 좋다. 한편으로는 좀 더 감상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도 있다. 누구나 언제든 떠난 이를 마음껏 그리워할 수 있겠구나, 떠난 이는 외롭지 않겠구나, 하고.

그리운 사람을 향한 마음들

올샤니 공동묘지(Olsany Cemetery)는 카프카의 묘를 다녀오던 길에 우연히 들른 공원묘지였다. 수령 많은 나무가 울창한 곳으로, 묘지이면서 동시에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이곳을 들른 어떤 이들은 그저 가벼운 산책 삼아 무덤 사이를 걸었고, 어떤 이들은 무덤을 경유지 삼아 본래 자신이 가려던 목적지로 향했다. 평범한 공원의 풍경이었다. 나와 은비도 벤치에 앉아 산책 나온 이들처럼 담소를 나눴다.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과는 한없이 수다를 떨고 싶어 진다. 그렇게 앉은자리에서 한두 시간쯤을 보낸 뒤, 슬슬 숙소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멀리 웬 백발의 노인이 보였다. 그는 어느 묘 앞에 놓인 화분들에 정성스럽게 물을 주고 있었다.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만 가까이 다가가, 묘비에 적힌 고인의 출생년과 사망년을 보았다. 망자의 나이를 헤아려 보니, 꼭 지금 꽃에 물을 주고 있는 노인의 나이쯤 될 것 같았다. 혹 배우자의 묘는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니 왠지 마음이 뭉클해졌다. 프라하 여행을 앞두고 몇몇 여행 서적을 읽었는데, 그중 어느 책엔가 적혀 있던, ‘체코 사람들에게 꽃 선물은 연애 감정을 의미합니다.’하는 문장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대체로 사랑을 전하고 싶을 때 꽃을 선물한다. 축하할 일이 있을 때, 기념할 일이 있을 때, 진심을 전하고 싶을 때, 행복을 전하고 싶을 때. 그리고 사랑을 말로써 전할 수 없게 된 순간에.

1986년 1월 7일에 쓰여진 일기

노인이 돌보는 꽃이 있어, 망자는 쓸쓸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언젠가 ‘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자’는 문장을 남기고 떠난 이를 떠올렸다. 유년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그 문장의 뜻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바라건대, 꽃 피는 사월의 프라하가 내게 선사한 풍경들을 오래도록 잊지 않기를. 긴 여행을 마치고 마침내 다시 돌아온 일상에서도 부디,
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꽃과 사랑하는 마음들이 있었던 4월의 프라하


✓ 프라하에서 살아보는 여행을 위한 Tip 3

Tip 1. 프라하 교통권

프라하성과 카렐교, 하벨 시장(Havel’s Market) 등 주요 관광지는 대부분 도보로 이동할 수 있지만, 좀 더 다양한 프라하의 면면을 보고 싶다면 교통권을 구매하는 편이 좋다. 교통권의 종류에는 1회권부터 1일권(24시간), 3일권(72시간), 30일권 등이 있는데, 프라하에 일주일 이상 머무는 여행자라면 30일권을 구매하는 게 비용 면에서 이득이다. 30일 권은 670KC(한화 약 3만 4천 원, 2019년 10월 기준)이며, 트램과 메트로, 버스를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Tip 2. 나플라브카 파머스 마켓(Naplavka Farmers' Market)

어느 지역에 대해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의 시장에 가보라는 말이 있다. 프라하의 블타바(Vltava) 강변에서는 매주 토요일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파머스마켓이 열린다(동절기는 휴업). 상인들은 신선한 식자재부터 빵과 디저트 등 간단한 먹거리, 문구와 수공예품 등 잡화, 형형색색의 꽃 등 다양한 물품을 저렴한 값에 판매한다. 재고가 소진되면 판매가 종료되므로, 되도록 아침 일찍 가는 것이 좋다. 장바구니 지참은 필수.
 
Tip 3. 프라하 3대 재즈 클럽

음악을 좋아한다면 프라하에 머무는 동안 한 번쯤은 재즈 클럽의 문을 두드려 보자. 프라하에는 저렴한 값에 재즈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많다. 그중에서도 레두타 재즈클럽(Reduta Jazz Club), 재즈 리퍼블릭(Jazz Republic), 아가르타(AghaRTA)가 프라하의 3대 재즈 클럽으로 통한다. 공연 팀에 따라 입장료가 약간씩 다르나, 평일에 가면 무료로 공연을 즐길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공연 일정 및 예약 방법은 각 재즈 클럽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레두타 재즈 클럽 www.redutajazzclub.cz
‧ 재즈 리퍼블릭 www.jazzrepublic.cz
‧ 아가르타 www.agharta.cz





에어비앤비 작가, 엄은솔

지난 겨울까지 일본 동북 지방의 소도시에 머무르며 한국과의 국제 교류 업무를 담당했다. 현재는 국내 모처에서 일본어 통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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